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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07 21:43 수정 : 2011.11.08 10:59

지난 9월, ‘진달래 냉면’ 사장 김숙자씨가 손님에게 내줄 음식을 챙기고 있다. 연중 내내 일해온 탓에 김씨의 무릎과 허리가 좋지 않지만, 아직 병원에 갈 짬을 만들지 못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조선족 대이주 100년
<1부>뿌리 ④성공과 실패

서울살이 조선족의 절반인 6만여명이 구로·금천·영등포에산다.
가난이 왁자한 곳에서 희소한 성공사례들이 생겨났다.

서울 구로구는 100년 묵은 ‘베드타운’이다. 가난한 노동자는 구로에서 혼곤한 잠을 청한다. 1910년대 부유한 일본인들이 구로·영등포에 섬유공장을 세웠다. 일본인에게 고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구로의 다다미방에서 잠을 잤다. 1960·70년대 군사정권은 구로에 한국 최초의 산업단지를 세웠다. 농촌에서 상경한 노동자들은 구로의 월세방에서 잠을 잤다. 구로의 공장들이 줄줄이 문닫은 1980년대, 낡은 월세방은 주인을 잃을 뻔했다. 그 무렵 중국 동북지역에서 조선족이 몰려왔다. 서울에서 가장 저렴한 거주공간이자, 지하철만 타면 수도권 곳곳의 일터로 나갈 수 있는 구로구 가리봉동에 조선족은 짐을 풀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당했던 조선족의 후손은 일제가 터를 닦은 구로에 살고 있다.

서울 구로의 거리에서 조선족은 차림새로 구분된다. 여자들의 옅은 화장은 푸석푸석한 얼굴 위에 들떠 있다. 귀밑까지 깎아올린 남자들의 머릿결엔 왁스·젤의 윤기가 없다. 중국 동북의 농촌에서 자란 그들의 육신에는 화학약품의 치장이 없다. 수수한 차림의 조선족은 땅을 보고 걷는다. 타향의 고달픈 중력이 그들의 어깨를 땅으로 잡아끈다.

‘진달래 냉면’ 식당에서 조선족은 비로소 홀가분하다. 이 냉면집에 멀끔한 서울 깍쟁이는 오지 않는다. 간혹 와도 조선족들이 금세 알아채고 한번씩 눈길을 준다. 이곳은 조선족의 해방구다. 조선족은 눈을 들어 상대를 똑바로 쳐다본다. 30여평의 냉면집은 서로 매기고 받는 기구한 팔자타령으로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그들은 냉면을 먹기 전 북한산 짝태(잡은 그대로의 명태) 볶음에 생맥주를 마신다. “한국 명태는 명태도 아니야. 먹을 수가 없어.” 자존심 강한 조선족은 숨겨뒀던 목청을 냉면집에서 되찾는다.

지난 7월 발표한 행정안전부 통계를 보면, 12만6000여명의 조선족이 서울에 산다. 구로·금천·영등포 지역에 사는 이는 6만명이 넘는다. 등록 외국인 기준으로 보면 한국 거주 조선족(36만6000여명)의 17%가 서울 남서지역에 밀집해 있다. 기준을 체류 조선족으로 넓히면 그 규모는 더 늘어날 것이다. *

그것은 인구학자의 통계이고, 장사치는 흘러다니는 돈부터 본다. 고단한 노동의 대가로 받은 몇푼의 돈이 서울 구로에서 뭉치를 이뤄 흐른다. 가난한 조선족들이 왁자지껄한 곳에서 부자 조선족이 탄생한다. 조선족을 상대하는 상권이 형성된 것이다.

10여년 전부터 밀집을 이룬 구로의 조선족 식당은 ‘간화자’(현대 중국식 한자)로 간판을 지어 올렸다. 한국인은 쉽게 알아볼 수 없다. 그들은 뜨내기 한국인 손님을 구태여 청하지 않는다. 김숙자(57)씨는 진달래 냉면과 옥수수 온면을 일용노동에 지친 동포들 앞에 내놓는다. “가리봉동만 따져도…” ‘진달래 냉면’ 사장 김씨가 손을 꼽았다. “식당이 130여개, 노래방은 30여개, 식품점은 10여개, 마사지샵은 너댓개 있지요.” 김씨는 가리봉동 조선족 상인들이 주축을 이룬 ‘재한동포연합총회’ 회장이기도 하다.


하루 매출 수백만원의 조선족 식당 사장은 한국 거주 조선족 가운데 상류층에 속한다. 다만 그 비율로 보아 조선족의 성공은 희소하다. 주말이면 조선족 유동인구가 수만명을 헤아리는 가리봉동에서 조선족 사장은 백수십명이다. 그들은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업자등록·세금납부 등에 어려움이 많다. “일단 ‘넘어오면’ 한국에서 잘살겠다는 각오를 하고 악착같이 일하지요.” 한국 국적 얻는 일을 김씨는 “넘어온다”고 표현했다. 김씨의 60대 남편, 30대 딸, 20대 아들까지 모두 넘어왔다. “국적 없는 사람들은 무작정 돈 많이 벌겠다는 허황된 생각을 많이 해요.” **

드문 성공을 움켜쥐려면 국적 말고 필요한 게 더 있다. “밑천이 있긴 해야죠.” 권리금·보증금·유동자금 등 5000만원은 있어야 가리봉동에 30평짜리 식당을 낼 수 있다. 월 80만~150만원을 받으며 일용잡부로 일하는 조선족이 장차 개업하길 바란다면 “부부가 함께 벌어야 한다”고 김씨는 말했다. ***

중국서 가져온 밑천을 보태 냉면 식당을 차려 악착같이 일해
‘부자’가 된 부부는 하루 5천원짜리 조선족쉼터도 운영한다.

남편의 월급은 생계비로 쓰고 아내의 월급을 고스란히 저축하면 3~5년 뒤에 5000만원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방문취업(H-2)비자의 최대 체류기간은 4년10개월이다. 돈을 모아도 한국에서 가게를 열기엔 시간이 빠듯하다. 그들은 돈을 들고 중국에 들어가 살 집을 장만한 뒤, 다시 한국에 나온다. 중국에 있어봐야 따박따박 월급 주는 일자리가 없다. 장사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동북의 조선족 집거 지역이 붕괴하면서 ‘조선족 경제권’은 연해·내륙의 대도시로 옮겨갔다. 중국 대도시 생활은 농촌 출신 조선족에게 또다른 도전이다.

이를 두고 중국 베이징 중앙민족대 박광성 교수는 “거주지(중국)와 경제활동지역(한국)의 분리가 고착화되면서, 조선족이 전통적 농민집단에서 초국적 시민집단으로 급속히 변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에서 돈 벌어 귀국했다가, 한국행 비자를 다시 받을 때까지 실업상태에 들어가는 ‘초국적 노동자(또는 실업자)’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주노동의 쳇바퀴를 뛰어나와 정착하려면 김씨와 같은 행운이 필요하다. 1997년 한국에 온 김씨의 밑천은 중국에 있었다. 그는 대학 졸업 뒤 중국 잡지사·출판사 등에서 일한 엘리트다. 남편은 하얼빈의대를 나와 대학 연구소에서 일했다. “중국에서도 원래 중상류로 살았어요. 다른 사람보다 2~3배는 벌었으니.” 김씨는 한국 온 지 두달 만에 식당을 차렸다. 중국에 있는 재산을 처분한 것이 보탬이 됐다.

‘진달래 냉면’ 맞은편의 또다른 조선족 식당은 지난 1년여 동안 두세차례 간판과 주인이 바뀌었다. “열에 셋은 장사하면서 오히려 돈을 까먹지요.” 돈을 까먹지 않으려고 김씨는 악착같이 일한다. 1년 내내 식당 문을 연다. 종업원이 밤 11시에 퇴근해도 김씨는 밤 1시까지 다음날 쓸 냉면 육수를 만든다. 기꺼이 일에 중독된 김씨 덕분에 그 가족은 정착을 넘어 번성을 꾀하고 있다. 한국에서 명문 사립대를 졸업한 20대 아들은 디자이너로 일한다. 30대 두 딸은 전문직·사무직의 한국인과 결혼했다. “우리 사위들은 어영부영하지 않고 맺고 끊는 게 분명해요. 또래 동포(조선족)들하고 수준 차이가 나죠.” ****

쉼터의 조선족은 날품을 팔고 운이 없는 날은 온종일 우두커니 앉아 있다.
몇년 일해 돈을 모아 장사를 해도 “열에 셋은 돈을 까먹어.”

김씨는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어 한국에 정착할 생각이다. “한국에선 각오 높게 너남없이 봉사를 많이 하잖아요. 조선족도 그런 걸 배워야지.” 식당 옆 건물을 빌려 조선족 쉼터를 마련한 것도 봉사의 하나다. 대부분 조선족은 한국 올 때 20만~30만원을 들고 온다. 그 돈으로는 여인숙도 부담이다. 하루 5000원인 쉼터는 종종 장기투숙의 거처가 된다.

지금 가리봉동 쉼터에는 20여명의 조선족이 있다. 그들은 매일 인력시장에 나가 날품을 판다. 운이 없다면 온종일 쉼터의 어둠 속에 우두커니 파묻혀 있어야 한다. 쉼터 냉장고에는 중국 향료와 참치캔과 김치통이 들어 있다. 선반 위에는 그들이 부려놓은 낡은 여행가방이 있다. 언제건 떠날 준비를 머리맡에 갖춰두고 그들은 혼곤한 잠을 청한다. *****

안수찬 기자, 안세희(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상원(경북대 경영학부) 인턴기자 ahn@hani.co.kr

※ 2부 1회 ‘거대한 이산’에서 돈 벌러 미국으로 떠난 조선족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취업비자 30만명 묶여 대기자 장사진

* 국내 체류 조선족 45만여명 가운데 29만여명이 방문취업(H-2)비자로 입국했다. 최대 4년10개월 동안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방문취업비자에는 ‘인원 제한’이 있다. 30만여명이 상한선인데, 규모를 더 늘리지 않겠다는 게 정부 방침이다. 현재 중국에는 6만~7만명의 조선족이 방문취업비자 신청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방문취업비자 체류자 29만여명이 중국에 돌아가야 그들의 몫이 나온다. 일단 귀국하면 다시 비자를 받을 확률이 높지 않으니, 그냥 눌러앉는 불법체류자는 계속 늘어난다. 전문직·기업인 등은 재외동포(F-4)비자를 받아 한국인과 똑같은 법적 신분을 누리지만, 극소수에만 해당하는 일이다.

조선족 식당들이 늘어선 서울 구로구 가리봉 시장 주변 거리.

한국선 날품임금 “그래도 중국 가면 부자”

** 김재용(가명·54)씨는 1980년대 한국에서 녹용·웅담가루를 팔았던 경험이 있다. 요즘은 일감이 없어 쉬는 날이 더 많지만, “벌면 순식간”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경제적 지위에 대한 그들의 ‘자의식’은 혼란스럽다. 한국 일용직의 임금을 받는 그들은 스스로 중국의 부유층을 자처했다. 실제로 한국돈 100만원이면 중국 교수 월급 이상이다. 김씨는 “이렇게 살아도 중국 가면 부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중국에 가서 부자 노릇할 기반이 약해지고 있다. 가리봉동 쉼터 관리를 맡은 지태림(50)씨는 지난 5월 고향 연길에 다녀왔다. “조선족은 없고 한족만 많더라”고 그는 말했다. 연길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다. “동포가 없으므로 연길에서 장사할 수는 없다”고 지씨는 말했다. 그는 연길이 아니라 서울에서 가게를 열 생각이다. 돈 벌기 위해, 번 돈으로 장사를 하기 위해 조선족은 가리봉동에 또 온다.

  

맞벌이 않으면 빈곤층 생활도 어려워

*** 건설현장을 전전하는 주현식(가명·48)씨는 “일거리가 없으니 직장에 들어가야겠다”고 말했다. 조선족에게 ‘현장’은 공사판, ‘직장’은 공장을 뜻한다. 길어야 4년10개월짜리 비자를 받은 조선족에게 안정적 일자리를 주는 고용주는 없다. 쉼터에서 만나 신상을 파악한 조선족 21명(남 11명, 여 10명)은 건설일용직(7명), 식당보조(4명), 파출부(3명), 간병인(2명), 공장 비정규직(1명) 등으로 일하고 있었다. 무직자도 3명이나 됐다. 임금 수준을 고려할 때,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빈곤층 생활조차 유지하기 힘들다. 자녀 양육을 희생해서라도 조선족 부부는 함께 한국에 나오려 애쓴다.

 

‘재한동포총연합회’가 운영하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조선족 쉼터.
차별대우에 “일 나갈땐 자존심 서랍에 둬”

**** “우리 중국인은….” 인터뷰에 응한 조선족들은 종종 그렇게 운을 뗐다. 중국보다 경제·문화적으로 우월한 한국에 정착하고 싶다는 조선족도 적지 않았으나, 몇몇 조선족은 속깊은 대화에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들은 “중국이 얼마나 잘사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집도 없으면서 중국에 집이 있는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이라고 한국인을 평했다. 그 배경에는 인격 모독이 있다. “일 나갈 때면 자존심은 서랍에 두고 나가지.” 서울조선족교회 쉼터의 여성들이 말했다. 교회 쉼터의 양매영 전도사는 “일터에 나가 제 대접을 받지 못하니, 쉼터로 돌아오면 ‘걸어다니는 폭탄’이 된다”고 말했다. 자신을 함부로 처우하는 한국인들에게 쌓인 울화를 조선족 여성은 서로에게 토한다. 쉼터 벽에는 ‘공동체 숙소 규칙’이 붙어 있다. “쉼터에서 싸움을 한 사람은 모두 퇴소한다”고 적혀 있다.

 

간병인 절반 차지…“남자들 부끄런 일 요구”

***** 간병인으로 일하는 김숙희(가명·50대)씨는 “한국 남자들은 부끄럼도 없느냐”고 물었다. “많은 남자(환자)들이 자위를 해달라고 한다”고 그는 말했다. 거기에 비하면 가래를 뽑고 대변 기저귀를 갈고 알몸을 목욕시키는 일은 대수롭지 않다. 자신을 노예로 부리려는 한국인들을 흉보며 조선족 간병인 여성은 병원 구석에서 빈한한 식사를 한다. 조선족이 아니라면, 간병인·식당보조·파출부 등 ‘밑바닥 돌봄노동’을 자청할 사람이 없다. 그들은 가장 추하거나 약하거나 도움이 간절한 한국인들을 상대한다. 이미 국내 간병인의 절반 이상이 조선족이다. 2010년 3월 현재 ‘전국간병인협회’에 등록된 10만7000여명의 간병인 가운데 60~70%가 조선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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