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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04 21:00 수정 : 2011.11.04 22:14

문화혁명 무렵, 박선석씨의 어머니는 가족사진을 모두 불태웠다. 중국 길림성 유하현 근처 자택에서, 유일하게 남은 아버지 사진을 박씨가 살펴보고 있다. 유하/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조선족 대이주 100년-1부 뿌리] ② 손님의 일생

이것은 어느 가족의 역사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서 태어난 박선석(67)씨의 뿌리는 서울에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1919년 3·1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서울의 거리에서 경찰에 맞아 죽었다. 당시 40대였다. 할아버지는 서울을 떠나 북간도의 조선독립군에 가담했지만, 1933년 ‘민생단 사건’ 때 총살당했다. 당시 26살이었다. 조선인 독립운동가 500여명이 일제 간첩으로 몰려 함께 죽었다. 중국 홍군이었던 박씨의 외삼촌은 ‘국공내전’에 참여했다. “일본놈과 싸우다 죽으면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겠으나, 되놈끼리 싸우는데 왜 나가느냐”며 외할아버지가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외삼촌은 국민당군에 붙잡혀 1947년 총살당했다. 당시 20대였다.

아버지는 중국 공산당 민주연맹 회원이었지만 당에서 버림받았다. 1958년 사회주의 경제 부흥을 내건 ‘대약진 운동’은 아버지를 부농으로 몰았다. 마을회관에서 핏기 없는 얼굴로 자아비판하던 아버지를 아들은 보았다. 아버지는 63살에 화병으로 죽었다. “사람 사는 세월이 아니다. 벙어리로 살아라.”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는 선대의 삶을 외아들 박씨에게 조용히 들려줬다. 1960년대 중반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박씨는 틈틈이 썼던 글뭉치를 돼지우리에 파묻었다. 나중엔 깡그리 불태웠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9년 “지주부농의 모자(낙인)를 벗겨주겠다”고 당 간부들이 박씨에게 말했다. 그 뒤로도 박씨는 농사만 지었다. 벙어리로 살며 키워낸 자식들은 10여년 전, 한국에 갔다. 큰아들·작은아들·외동딸은 부품 공장·폐수처리장 등에서 일한다. “죽어도 한국에 안 간다”는 막내아들은 중국 칭다오(청도)에서 일한다.

노부부만 사는 시골집에서 격변의 세월은 가뭇없다. “우리는 언제나 피난하며 살았어.” 1945년 태어난 ‘해방둥이’ 박씨가 말했다. “손님으로 와서 의붓아들로 사는 거지.” 그것은 조선족의 역사다.

유하/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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