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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03 21:09 수정 : 2011.11.03 22:46

[조선족 대이주 100년 〈1부〉뿌리] ① 마지막 학교

중국 중등 교육제도는 초중(중학교)과 고중(고등학교)으로 구분된다. 유하조중은 초중과 고중 과정을 모두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완전’ 중학교다. 원래 고중 과정에도 조선족만 진학했는데, 학생 수가 줄어 고중 과정을 없앴다가, 직업고중(전문계 고등학교)을 개설하여 한족 학생을 받아들였다. 대학에 진학하려는 유하현의 조선족 학생은 매하구시·통화시 등 다른 지역의 조선족 고중을 다녀야 한다.

필요한 물품과 시설은 스스로 구하여 만들어왔다. 1979년 유하현 각 마을의 조선족들이 자전거를 타고 몰려와 현재의 학교 건물을 지어 올렸다. 학교에는 도시의 상하수도 시설이 미치지 못한다. 교사와 학생들은 지하수를 길어 올려 쓰고 있다. 기숙사에는 세탁기가 없다. 뜨거운 물은 나오지 않는다. 샤워 시설과 수세식 화장실도 없다. 아침·저녁마다 학생들은 북새통 속에 깔깔대며, 차가운 지하수 나오는 물꼭지 앞에서 세수와 빨래를 해결한다.

사정은 교사들도 비슷하다. 학생들에게 장구춤을 가르치려고, 유하조중 교사들은 폐품을 자르고 붙여 플라스틱 장구 수십여개를 직접 만들었다. 교정 한 켠에는 이 학교의 전신인 ‘은양학교’를 기리는 ‘은양정’이 있다. 조선족 교사들이 직접 흙을 나르고 색을 입혀 작은 정자를 지었다.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은 일제에 의해 사지가 절단됐고, 당시 학생들은 국치일만 되면 하루 종일 굶었다. 100년의 긍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 유하조중에선 매일 일어난다. 지난 7월 학교를 찾았을 때, 방과후를 활용해 교사들이 쟁기를 들고 운동장의 자갈을 직접 골라내고 있었다. “이런 일은 우리가 하면 되고, 학생들은 공부해야지요.” 류복련 교장의 얼굴에는 땀 맺히지 않은 자리가 없었다.

류복련 (52살·유하조중 교장)


류복련 (52살·유하조중 교장)
1980년부터 조선족 학교에서 가르쳤다. 1997년 유하조중에 부임했다. 그 해, 유하조중은 직업고중에 한족 학생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결단을 내렸다. 고중의 수익 구조에 기초해 초중의 조선족 학생을 키우는 방식은 “조선족 학교의 새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고 류 교장은 말했다. 2005년, 유하현의 모든 조선족 중학교가 사라지고 유하조중으로 통폐합됐다. 그 해, 교사 류복련은 교장에 취임했다.

해마다 새학기가 다가오면, 류 교장은 초중 과정의 신입생을 모집하느라 바쁘다. 조선족 마을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머리를 조아리기도 한다. “마을에는 이제 노인들만 남았어요. 청장년은 모두 외국에 갔고, 잠시 휴식하러 고향 마을을 찾을 뿐이죠.” 류 교장이 말했다. 연해·내륙 도시로 떠난 조선족은 자식들을 한족 학교에 진학시킨다. 결혼 적령기에 외국으로 간 조선족은 현지에서 자식을 낳아 기른다. 조선족 마을에는 노인과 아이만 남았다. 아직 형편이 어려워 자식을 데려가지 못한 경우다.


“조선족 학교가 조선족 문화의 중심지”라고 류 교장은 몇번이나 말했다. 대화 중에도 류 교장의 휴대폰은 쉴새없이 울렸다. 대부분 학교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과 협조를 청하는 통화였다. 유하조중이 문을 닫으면 유하현의 조선족 역사·문화 공동체도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류 교장은 온 몸에 떠안고 있었다.

김경수 (39살·유하조중 교사)


김경수 (39살·유하조중 교사)
길림성 집안시에서 태어났다. 압록강 건너 북한 만포가 그의 외가다. 사범학교 졸업 뒤, 1994년부터 조선어문을 가르쳤다.

유하조중 학생들이 배우는 조선어문 교과서는 연변교육출판사가 발행했다. 그가 교단에 선 1994년 무렵만 해도 교과서에는 북한 문학 작품이 많이 실렸다. 2000년대 초, 새로 편찬된 조선어문 교과서에서 북한 작품은 줄고 김춘수·도종환·이육사 등 한국 문학이 늘었다. 한국과 가까워진 덕분인데, 그 한국 때문에 김경수 교사의 고민은 커졌다.

“부모와 함께 사는 학생은 한 학급에 한두명이고 학부모 대부분 한국으로 떠났다”고 김 교사는 말했다. 부모들은 김 교사에게 아이들 용돈을 맡겨두고, 김 교사는 매주 조금씩 아이들에게 나눠준다. “저희 말을 안 들어요. 모두 선생님한테 맡겨요.” 한국에 간 학부모들은 김 교사에게 그렇게 부탁한다. 유하조중은 일요일에도 특별활동 시간이 있다. 토요일 저녁에는 교실에서 영화를 틀기도 한다. 보호자 없이 기숙사에서 지내는 학생들을 위한 일이다.

조선족끼리 어울릴 기회가 줄면서 조선족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도 위태로와졌다. “요즘 아이들 사유를 지배하는 언어는 한어(중국어)”라고 김 교사는 말했다. 그나마 유하조중 학생들은 한국어를 잘 하는 편이다. 다른 조선족 학교에선 물리·지리·역사·수학 등에서 중국어 교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유하조중(초중)은 모든 과목에서 한국어 교재를 쓰고 있다.

김 교사는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숙식한다. 그의 월급은 2천위안(약 36만원) 정도다. 중국에선 비교적 괜찮은 직업이지만, 한국에서 돈벌어오는 일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래도 학교를 떠날 생각이 김 교사에겐 없다.

문학을 사랑하는 김 교사는 아직 노총각인데,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이 붉어진다. 젊은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등 타지로 떠나면서, 조선족 청장년의 결혼이 힘들어졌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학생들은 김 교사를 사뭇 어려워 한다. 담배 피다 걸리면, 태도와 윤리를 중시하는 김 교사한테 크게 혼이 난다.

김림향 (15살·유하조중 초중 2학년)


김림향 (15살·유하조중 초중 2학년)
이혼하여 한국에 사는 엄마와 지금까지 두번 통화했다. 헤어진 지 2년만인 소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통화했다. 림향은 엄마에게 울면서 말했다. “왜 전화 안해. 왜 생일날 선물 안보내줘.” 전화기 너머에서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학교 3학년 때, 림향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는 재혼하여 낳은 어린 아들의 얼굴을 컴퓨터 화면으로 보여줬다. ‘밉게 생겼다’고 림향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난 6월, 림향은 7년여 만에 처음 엄마를 만났다. 조선어문 글짓기 대회에 입상한 유하조중 학생 몇 명이 한국 단체의 초청을 받아 서울을 방문했다. 림향도 한국에 왔다. 아빠를 먼저 만났다.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 아빠와 나란히 서있는데 엄마가 나타났다. “얼굴에 살이 좀 쪘구나.” 엄마가 말했다. 림향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점심에는 갈비, 저녁에는 닭고기를 먹었다. 해물탕은 림향의 입에 맞지 않았다.

“너무 오래 안 만나서, 엄마를 만나도 별로 할 말이 없었어요.” 나중에 림향이 말했다. “옛날엔 머리가 길었는데, 단발머리여서 보기 싫었어요. 키도 작아졌어요. 나보다 작더라고요.” 림향은 자신보다 작아진 엄마를 한나절만 만나고 헤어졌다. 잠은 아빠 혼자 지내는 방에서 잤다. 아빠의 단칸방이 있는 동네가 서울의 어디인지 림향은 알 수 없었다.

지난 8월, 아빠와 재혼한 훗엄마(새엄마)는 한족이다. 유하현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다. “훗엄마와 친구처럼 지낸다”고 림향은 말했다. 한족 훗엄마와 중국어로 대화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훗엄마가 있어도 림향은 기숙사에서 학기를 보낸다. 방학이 되면 아파트로 간다.

한국에서 일하는 아빠는 월 500위안(약 9만원)의 용돈을 보내준다. 림향은 아빠를 더 따른다. “아빠가 엄마 사랑까지 나한테 다 줬다”고 림향은 말했다. 다만 “아빠가 해주는 채소(음식)는 맛이 없다”고 생각한다. 림향은 조선어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 장차 연예인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일하는 게 꿈이다.

채문실 (18살·유하조중 고중 2학년)


채문실 (18살·유하조중 고중 2학년)
교사들은 한결같이 “학습 기초가 튼튼하고 지력이 우수하여 공부를 잘 했었다”고 문실을 평가했다. 그것은 아쉬움이 섞인 ‘과거 시제’였다. 6살 때 아빠가, 10살 때 엄마가 한국에 갔는데, 초중(중학교) 입학 이후 문실의 성적이 떨어졌다. “공부와 집안일이 섞여 있으니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문실은 말했다.

12살 때, 엄마·아빠는 유하조중 근처에 아파트를 샀다. 그 전까진 유하 인근 시골의 큰아버지 집에서 방 하나에 네 식구가 살았다. 새 아파트를 사고, 부모는 다시 한국에 갔다. 가난은 덜었지만 이별을 짊어졌다. “그때 엄마도 울었어요. 저더러 ‘동생 잘 보라’고 말했어요.” 문실이 회고했다. 문실은 초중 졸업 뒤, 한국의 전문계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직업고중에 진학했다.

방 2개와 주방·욕실이 있는 아파트에서 문실은 남동생을 돌보며 지낸다. 이틀에 한번씩 청소·빨래를 한다. 식사 준비도 문실의 몫이다. “닭알(계란)도 굽고, 감자볶음도 한다”고 문실이 말했다. LG 냉장고에는 엄마가 담궈둔 배추김치와 고추장아찌가 있다. 밥은 쿠쿠밥솥에 짓는다. 가끔 한국 신라면도 끓여 먹는다.

남동생은 유하조중 초중과정에 다닌다. 학교가 파하면, 남동생은 친구들과 어울려 밖에서 놀다가 저녁 무렵 집에 온다. 배가 아프다며 학교에 빠지는 일도 있다. “동생이 누나를 크게 안 따른다”고 문실은 말했다. 침대가 있는 큰 방은 동생이 쓰고, 문실은 작은 방에서 지낸다. 문실의 방에는 곰인형이 4개 있다. 작은 책상 위에 컴퓨터가 있다. 문실은 컴퓨터로 한국 드라마를 본다. 컴퓨터 옆에는 한국에서 발행한 국어사전, 중한사전이 있다.

말수가 적은 문실의 머리에는 새치가 많다. “소학교 때부터 생겼다”고 문실은 말했다. 초중 3학년 때까지 문실은 자주 아팠다. 그런 날이면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아빠는 일찍 잠 들었다. 걱정할까봐 아프다는 이야기는 안 했다. 엄마 목소리만 듣고 문실은 전화를 끊었다. 문실이 사는 아파트 거실엔 가족 사진이 한장 붙어있다. 사진 속에서 어린 문실은 엄마의 팔을 꼭 붙들고 있다.

고중 입학 뒤엔 머리 아프고 열나는 일이 줄었다. 문실의 성적도 다시 좋아졌다. 지난 1학기에 4차례 시험을 쳤는데, 1등을 3번 했다. 나머지 한번은 2등이었다. 직업고중이지만 대학갈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문실은 이공계열에서 이름 높은 장춘대학에 진학할 생각이다.

리남 (17살· 매하구조선족 고중 1학년)


리남 (17살· 매하구조선족 고중 1학년)
지난 7월, 유하조중 초중 과정을 졸업하고, 매하구 조선족 고중에 입학했다. 고중 입학 시험에서 통화시·통화현·유하현·매하구시 등을 포괄하는 ‘통화 지구’를 통틀어 7등을 했다. 그는 유하조중 축구부에서 미드필더를 맡고 있다. “축구할 사람이 없어서 제가 하는 거지요.” 리남은 겸손하기까지 하다.

그는 유하현에서 60㎞ 떨어진 어느 조선족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선족 마을 근처에는 조선족 학교가 없었다. 리남은 소·중학교 모두 유하현에서 다녔다. 아빠는 오래 전부터 중국 청도에 나가 돈을 벌었고, 5년 전부터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가끔 명절 때 아빠가 중국에 오는데, 고향에 돌아온 아빠는 술을 마시고 아무 말 없이 잠든다.

친엄마는 리남이 5살 때 이혼했다. 유하조중 입학식날, 친엄마가 학교를 찾아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친엄마가 재혼했고, 얼마 전 한국에 갔다는 것 정도만 전해 들었다. “미워 안해요. 12년이나 지났어요. 누구도 잘못 안했어요. 거기서 자식 낳고 와도 관계(상관) 없어요. 아빠 엄마 간의 일이에요.” 리남은 또박또박 말했다.

지난해 설, 할아버지는 “훗엄마(새엄마)가 생긴다”고 리남에게 말했다. “특별한 감각(느낌)은 없었어요.” 리남이 회고했다. 아빠가 데려온 훗엄마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동갑내기 중학생과 4살 어린 소학생이었다.

리남의 방은 유하조중 남자 기숙사 1층에 있다. 2층 침대를 함께 쓰는 8명 학생 가운데 2명의 부모가 이혼했다. 나머지 학생의 부모도 모두 외지에 나갔다. “(부모와 떨어져 있는게) 싫다고 다 이야기하죠. 그런데 이젠 혼자 있는게 좋아요. 혼자 있고 싶어요.”

리남에겐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있다. 유하조중 동기인데, 이번에 매하구 고중으로 함께 진학하게 됐다. 아직 마음을 고백하진 못했다. “왜 좋은지는 똑똑이 모르겠어요.” 벌개진 얼굴로 리남이 말했다. “한족이랑 결혼 안해요. 내 자식도 조선족으로 키워야지요.”

얼굴에 여드름이 많은 리남의 포부는 북경대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쓴 력사극에 흥취(흥미)가 있다”고 리남은 말했다. 리남은 지난 8월, 통화지구 조선족 중학교 축구부끼리 맞붙은 ‘민족운동대회’에 출전했다. 4개 학교가 참가한 지난해, 유하조중은 3등에 머물렀다. 올해는 3개 학교가 참가했고, 유하조중이 우승했다. 아빠가 한국에서 부쳐준 하얀 축구화를 신고 리남은 미드필더로 뛰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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