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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in]꽃제비, 성공이란 영어를 꾹꾹 눌러쓰다
탈북자의 아메리칸드림
연변 떠돌다 미국 와 양아들로부자가 되고 싶어 열심히 공부
“예일이나 하버드를 가고 싶다” 김철민(가명·21)씨에겐 두 명의 아버지가 있다. 친아버지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회계원으로 일했다. 김씨가 인민학교(한국의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끼니 거르는 일이 잦아졌다. 자식을 먹이느라 아버지는 더 자주 굶었다. 아버지는 바짝 마른 몸으로 방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2002년 3월, 아버지는 세상을 떴다. 2006년, 혼자 두만강을 건넌 김씨는 ‘꽃제비’가 되었다. 구걸하며 떠도는 어린 탈북자를 꽃제비라 부른다. 2007년 2월, 난민 자격을 얻어 미국에 갔다. 두번째 아버지를 만났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사는 아버지는 뚱뚱한 흑인이었다. 미국 정부는 보호자 없는 미성년 난민을 ‘양육 부모’한테 맡긴다. 당시 김씨는 17살의 탈북 난민이었다. 새아버지를 보면 친아버지가 생각났다. “흑인 아버지는 고릴라처럼 뚱뚱한데, 아버지의 몸은 정말 작았거든요. 태어난 곳이 다르다고 누구는 뚱뚱하고 누구는 굶어야 하는 게 참 억울한 일이라 생각했죠.” 올해 21살이 된 김씨는 자립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부턴 진짜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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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민씨가 리치먼드의 동네를 거닐고 있다. 혼자 미국에 온 김씨는 평소 마음에 드는 집을 눈여겨봐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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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제비가 되어 연변을 떠돌다 한글 간판을 내건 교회를 만났다. ‘여기서 빌어먹다 도적질을 해서 나와야겠다’고 김씨는 생각했다. 두달쯤 지나 한인 선교사를 만났다. “미국에 가면 자유가 있고, 공부의 기회가 있어.” 한인 선교사는 김씨의 새로운 욕망을 일깨웠다. 어느 나라를 선택해 어떻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어린 김씨는 해본 적이 없었다. 한인 교회를 통해 김씨는 미국을 발견했다. 탈북한 지 1년 만인 2007년 2월, 김씨는 난민 지위로 미국에 왔다.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그날 저녁 식사 메뉴는 닭다리였다. 김씨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온 지 석달이 지나고,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지만, 계속 배가 고팠다. 뚱뚱한 흑인 아버지에겐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한 명은 친아들, 세 명은 21살 때까지 맡아 기르는 ‘양육 아들’이었다. 미국 정부는 미성년 난민을 맡아 기르는 ‘양육 부모’에게 보조금을 지원했다. 김씨는 흑인 아버지의 세번째 양육아들이었다. 접시에 닭다리 서너개가 남았다. 김씨는 다른 형제들 눈치를 살피다 포크를 내려놓았다. 흑인 아버지가 말없이 닭다리를 집어 김씨 접시 위에 놓았다. 알 수 없는 뜨거운 덩어리가 북받쳤다. 김씨는 울었다. 17살 탈북 난민 양아들은 그날 새로운 욕망을 찾았다.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나도 누군가에게 음식을 나눠줄 수 있을 때까지.” 김씨는 난생처음 ‘잉여’를 알게 됐다. 잉여를 베풀려면 부자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는 항상 말했다.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굶어 죽은 아버지는 아들의 공부를 걱정했다. 그 말은 유언이 됐다. 미국 흑인 아버지는 닭다리를 주었고, 북한의 친아버지는 말을 남겼다. 미국 아버지를 볼 때마다 김씨는 친아버지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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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24일,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만난 김철민(가명·21)씨가 자신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와서 축하해준 미국인 친구들에게 답례 카드를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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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최순이(가명·21)씨의 어머니(42)가 지난 7월23일 리치먼드 시내의 생선가게에서 흑인 손님을 상대로 장사하고 있다. 어머니는 주문받고 흥정하는 일상 영어를 할 줄 알지만, 영어로 쓸 줄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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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3시간 자고 억척같이 일
자식 출세시키겠다는 일념뿐 지난 2007년 2월 난민 지위로 미국에 입국했을 때, 탈북자 최순이(가명·21)씨의 나이도 17살이었다. 그는 지금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2년제 대학에 다니고 있다. 처음 고등학교에 갔을 때, 최씨는 ‘싯 다운’(앉아)이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 계속 서 있었다. 미국 학생들이 키득거리자 최씨는 울었다. 요즘에는 영어가 늘었다. 미국 사람들과 말싸움이 생겨도 지지 않는다. 최씨에게는 어머니가 있다. 친어머니다. 미국 올 때 홀어머니(42)와 함께 왔다. 또래의 탈북 젊은이들은 최씨에게 “복 받았다”고 말한다. 탈북자의 욕망과 미국이라는 현실의 간극을 메워줄 유일한 무기는 돈이다. 최씨의 어머니는 다른 탈북자와 달리 돈 버는 일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미국에 오자마자 어머니는 한인 교회에 손을 벌렸다. “나 북에서 왔는데, 아이도 키워야 하고 남편도 없고 너무 힘들어요.” 교인들이 남긴 밥과 김치를 받아 먹었다. 예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예수 믿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어요. 그 시간에 돈 벌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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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 가시자 잘살겠단 욕망
꿈은 크지만 현실 벽은 높다 2011년 8월, 김철민씨는 독립한다. 미국 정부가 양육 부모에게 제공하는 지원금은 올해가 마지막이다. 김씨는 혼자 뉴욕에 가서 대학을 다닐 생각이다.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로 벌 것이다. 장차 “국제 비즈니스 일을 하고 싶다”고 김씨는 말했다. 최순이씨는 당분간 어머니와 함께 지낼 것이다. “패션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외모에 관심 많은 최씨가 말했다. 탈북 1.5세대와 그 부모의 꿈은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다. 단계적이지 않고 비약적이다. 무엇을 언제까지 어찌 해보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돈을 많이 벌겠다, 성공하겠다”는 말만 한다. 지난 4월, 미 하원에서 발의된 ‘탈북 난민 입양법안’은 중국을 비롯한 제3국에 있는 ‘탈북 고아’들이 고아임을 입증할 서류가 미비하더라도 미국 가정에 입양될 수 있도록 “북한 어린이들의 입양을 촉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입양 대상에는 제3국은 물론 한국에 있는 탈북 고아까지 포함된다. 미국은 더 많은 철민과 순이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 3회 ‘탈북과 탈남’에서는 한국 국적을 얻었으나 다시 미국으로 가는 탈북자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뉴욕·로체스터·리치먼드/ 글·사진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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