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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8.15 21:49 수정 : 2011.08.16 11:31

[한겨레in]꽃제비, 성공이란 영어를 꾹꾹 눌러쓰다
탈북자의 아메리칸드림

연변 떠돌다 미국 와 양아들로
부자가 되고 싶어 열심히 공부
“예일이나 하버드를 가고 싶다”

김철민(가명·21)씨에겐 두 명의 아버지가 있다. 친아버지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회계원으로 일했다. 김씨가 인민학교(한국의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끼니 거르는 일이 잦아졌다. 자식을 먹이느라 아버지는 더 자주 굶었다. 아버지는 바짝 마른 몸으로 방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2002년 3월, 아버지는 세상을 떴다.

2006년, 혼자 두만강을 건넌 김씨는 ‘꽃제비’가 되었다. 구걸하며 떠도는 어린 탈북자를 꽃제비라 부른다. 2007년 2월, 난민 자격을 얻어 미국에 갔다. 두번째 아버지를 만났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사는 아버지는 뚱뚱한 흑인이었다. 미국 정부는 보호자 없는 미성년 난민을 ‘양육 부모’한테 맡긴다. 당시 김씨는 17살의 탈북 난민이었다.

새아버지를 보면 친아버지가 생각났다. “흑인 아버지는 고릴라처럼 뚱뚱한데, 아버지의 몸은 정말 작았거든요. 태어난 곳이 다르다고 누구는 뚱뚱하고 누구는 굶어야 하는 게 참 억울한 일이라 생각했죠.” 올해 21살이 된 김씨는 자립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부턴 진짜 혼자다.

김철민씨가 리치먼드의 동네를 거닐고 있다. 혼자 미국에 온 김씨는 평소 마음에 드는 집을 눈여겨봐 둔다
400명 이상의 미국 거주 탈북자 가운데 미성년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한국 정부 통계를 보면, 국내 거주 탈북자 가운데 19살 이하가 전체의 16%다. 미국 국무부가 창설한 보수 성향의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 2009년 9월, 미국 거주 탈북난민 79명의 나이를 조사했는데, 19살 이하 탈북자가 13명으로 전체의 16%였다.

이들은 ‘미국 탈북자 1.5세대’다. 어린 나이에 미국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지난 4월, 미국 하원은 탈북 미성년자의 미국내 입양을 북돋겠다는 ‘북한 난민 입양법안’을 발의했다. 법안이 통과되면 ‘미국 탈북자 1.5세대’는 더 늘어날 것이다. 2004년 ‘북한 인권법’ 통과에 이어 미국은 탈북자 대거 수용의 두번째 국면을 준비하고 있다. 어린 탈북자에게 진짜 도움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2006년, 두만강을 건널 때, 김철민(가명·21)씨의 욕망은 한끼 식사였다. 당시 16살 김씨는 한끼 식사를 위해 구걸했다. ‘꽃제비’ 생활을 시작했다. 연변 조선족 마을을 돌며 아무 집에나 들어가 음식을 구했다. 구걸한다고 모두 밥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 세끼 먹는 일은 드물었다. 밤이 되면, 조선족이 비우고 떠난 집에 들어가 잠을 잤다.


꽃제비가 되어 연변을 떠돌다 한글 간판을 내건 교회를 만났다. ‘여기서 빌어먹다 도적질을 해서 나와야겠다’고 김씨는 생각했다. 두달쯤 지나 한인 선교사를 만났다. “미국에 가면 자유가 있고, 공부의 기회가 있어.” 한인 선교사는 김씨의 새로운 욕망을 일깨웠다. 어느 나라를 선택해 어떻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어린 김씨는 해본 적이 없었다. 한인 교회를 통해 김씨는 미국을 발견했다. 탈북한 지 1년 만인 2007년 2월, 김씨는 난민 지위로 미국에 왔다.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그날 저녁 식사 메뉴는 닭다리였다. 김씨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온 지 석달이 지나고,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지만, 계속 배가 고팠다. 뚱뚱한 흑인 아버지에겐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한 명은 친아들, 세 명은 21살 때까지 맡아 기르는 ‘양육 아들’이었다. 미국 정부는 미성년 난민을 맡아 기르는 ‘양육 부모’에게 보조금을 지원했다. 김씨는 흑인 아버지의 세번째 양육아들이었다. 접시에 닭다리 서너개가 남았다. 김씨는 다른 형제들 눈치를 살피다 포크를 내려놓았다. 흑인 아버지가 말없이 닭다리를 집어 김씨 접시 위에 놓았다. 알 수 없는 뜨거운 덩어리가 북받쳤다. 김씨는 울었다.

17살 탈북 난민 양아들은 그날 새로운 욕망을 찾았다.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나도 누군가에게 음식을 나눠줄 수 있을 때까지.” 김씨는 난생처음 ‘잉여’를 알게 됐다. 잉여를 베풀려면 부자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는 항상 말했다.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굶어 죽은 아버지는 아들의 공부를 걱정했다. 그 말은 유언이 됐다. 미국 흑인 아버지는 닭다리를 주었고, 북한의 친아버지는 말을 남겼다. 미국 아버지를 볼 때마다 김씨는 친아버지를 생각했다.

지난 7월24일,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만난 김철민(가명·21)씨가 자신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와서 축하해준 미국인 친구들에게 답례 카드를 적고 있다.
김씨는 젊은 탈북자 가운데서도 건실히 지내는 축에 속한다. 처음 미국 고등학교에 갔을 때, 김씨는 두려웠다. 북한에선 미국 사람들을 “두발 달린 승냥이”라고 가르쳤다. 김씨는 혼자 점심을 먹었다. 주변의 미국인 학생들이 뭐라 떠드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과학 수업인지 영어 수업인지도 모르고 교실에 앉아 있었다. 김씨는 그냥 교과서를 외웠다. 1년이 지나자 영어 대화가 가능해졌다. 얼마 전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오는 9월, 뉴욕에 있는 2년제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다. 그동안 김씨는 성인이 되었고, 욕망은 더욱 커졌다. 2년제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4년제 대학에 들어갈 생각이다. “예일대나 하버드대를 가고 싶다”고 김씨는 말했다.

굶주림 때문에 북한을 떠났다고 미국 거주 탈북자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그러나 미국 거주 탈북자들의 고민은 끼니를 챙기는 데 있지 않았다. 일단 밥을 먹게 되면 그들은 더 잘 살겠다는 욕망에 눈뜬다. 경쟁을 뚫어야 한다는 압박도 시작된다. 미국 대사관에서 난민 심사를 받는 동안, 김씨는 한국 드라마를 봤다. <신입사원>이라는 드라마도 봤다. 주인공 에릭은 취직을 못했다. 배고파 바닥에 쓰러지면서 “나 라면 좀 끓여줘”라고 말했다. 그 장면을 보고 김씨는 미국행 결심을 굳혔다. “한국에서 태어나 학교 나와도 저렇게 힘든데, 내가 아무리 똑똑한들 못 따라가겠구나, 미국 가서 영어라도 배우자, 생각했죠.”

대다수 미국 거주 탈북자는 자신의 꿈을 몇 단어로 표현한다. ‘하버드, 예일, 로스쿨, 의사’ 등이다. 10대와 20대는 고소득 직업을 꿈꾸고, 30대 이상이면 제 자식이 최고 명문대에 입학하길 꿈꾼다. 그것은 높은 꿈이어서 아름답지만, 현실과 거리가 있어 위태롭다.

탈북자 최순이(가명·21)씨의 어머니(42)가 지난 7월23일 리치먼드 시내의 생선가게에서 흑인 손님을 상대로 장사하고 있다. 어머니는 주문받고 흥정하는 일상 영어를 할 줄 알지만, 영어로 쓸 줄은 모른다.
10대 시절 미국으로 건너온 탈북자는 영어를 모른다. 김씨처럼 독한 마음을 먹어야 고교 과정에서 초급 영어를 익힌다. 열심히 공부한 미성년 탈북자들은 2년제 대학에 진학한다. 미국에서 가장 손쉽게 진학할 수 있는 대학이다. 젊은 탈북자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번다. 막대한 비용의 명문 사립대에 진학해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미국 수재들과 경쟁하여 의사·변호사 등이 되기까지 갈 길이 한참 멀다. 2006년 이후 미국에 건너온 10대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2년제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그들의 욕망이 어떻게 충족될지는 몇년 지나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자식을 데리고온 엄마는
하루 3시간 자고 억척같이 일
자식 출세시키겠다는 일념뿐

지난 2007년 2월 난민 지위로 미국에 입국했을 때, 탈북자 최순이(가명·21)씨의 나이도 17살이었다. 그는 지금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2년제 대학에 다니고 있다. 처음 고등학교에 갔을 때, 최씨는 ‘싯 다운’(앉아)이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 계속 서 있었다. 미국 학생들이 키득거리자 최씨는 울었다. 요즘에는 영어가 늘었다. 미국 사람들과 말싸움이 생겨도 지지 않는다.

최씨에게는 어머니가 있다. 친어머니다. 미국 올 때 홀어머니(42)와 함께 왔다. 또래의 탈북 젊은이들은 최씨에게 “복 받았다”고 말한다. 탈북자의 욕망과 미국이라는 현실의 간극을 메워줄 유일한 무기는 돈이다. 최씨의 어머니는 다른 탈북자와 달리 돈 버는 일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미국에 오자마자 어머니는 한인 교회에 손을 벌렸다. “나 북에서 왔는데, 아이도 키워야 하고 남편도 없고 너무 힘들어요.” 교인들이 남긴 밥과 김치를 받아 먹었다. 예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예수 믿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어요. 그 시간에 돈 벌 수 있는데….”

어머니는 하루에 2~3시간만 잤다. 양로원과 전기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새벽 3시 집에 와서는 재봉틀을 잡았다. 바지 하나를 기워 한인 세탁소에 주고 5달러를 받았다. 주변 미국인 집을 찾아다니며 잔디 깎는 일을 구했다. “북한에서 왔다”고 말하며 일자리를 구걸했다. 아침에도 깎고 밤에도 깎았다. 코피가 수시로 쏟아졌다. 2년여 만에 생선가게를 차렸다. 월세를 내며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 돈이 벅차다. “한달만 집세가 밀려도 우리 식구는 빈털터리가 된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는 이유가 있다. 딸 순이씨에겐 병이 있다. 딸은 시름시름 아팠다. 어머니는 딸의 병을 고치겠다고 탈북했다. 이웃 북한 주민들은 중국 남자에게 돈을 받고 딸을 시집보냈다. 순이씨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함께 중국으로 갔다. 중국 연변의 공장에서 새벽 2시까지 일해 80만원을 모았다. 조선족 의사에게 수술을 맡겼다. 몸 곳곳에서 종양이 자라는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어머니의 고생을 지켜본 순이씨는 벽돌공장에 나가 벽돌을 날랐다. 순이씨는 다시 앓았다. 종양도 완전히 제거되지 못했다. 어머니는 미국행을 결심했다. “세상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니까 의술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의 수술비는 비쌌다. 4만달러가 필요했다. 어머니는 지금 그 돈을 모으고 있다. 도움 줄 사람이 없을지 애타게 찾고 있다. 딸의 병을 고치겠다고 미국에 왔지만, 이젠 새로운 꿈도 꾸고 있다. “2년제 대학 말고 4년제 대학에 보내야죠.” 어머니가 말했다.

미국 거주 탈북자 대다수는 고립과 좌절을 경험한다.(15일치 1회 ‘가족의 붕괴’ 참조) 그러나 탈북자 가운데서도 젊은이와 중년,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있다. 어린 나이에 미국에 간 탈북자 1.5세대는 교육을 통해 정착을 노린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여성은 남성에 비해 좀더 빨리 돈을 번다. 탈북자들의 미국행 열풍이 시작된 2006년 이후 5년이 지났다. 그들 앞에는 중산층과 빈곤층에 이르는 두가지 길이 놓여 있다.

굶주림 때문에 북한 떠나와
허기 가시자 잘살겠단 욕망
꿈은 크지만 현실 벽은 높다

2011년 8월, 김철민씨는 독립한다. 미국 정부가 양육 부모에게 제공하는 지원금은 올해가 마지막이다. 김씨는 혼자 뉴욕에 가서 대학을 다닐 생각이다.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로 벌 것이다. 장차 “국제 비즈니스 일을 하고 싶다”고 김씨는 말했다. 최순이씨는 당분간 어머니와 함께 지낼 것이다. “패션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외모에 관심 많은 최씨가 말했다. 탈북 1.5세대와 그 부모의 꿈은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다. 단계적이지 않고 비약적이다. 무엇을 언제까지 어찌 해보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돈을 많이 벌겠다, 성공하겠다”는 말만 한다.

지난 4월, 미 하원에서 발의된 ‘탈북 난민 입양법안’은 중국을 비롯한 제3국에 있는 ‘탈북 고아’들이 고아임을 입증할 서류가 미비하더라도 미국 가정에 입양될 수 있도록 “북한 어린이들의 입양을 촉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입양 대상에는 제3국은 물론 한국에 있는 탈북 고아까지 포함된다. 미국은 더 많은 철민과 순이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 3회 ‘탈북과 탈남’에서는 한국 국적을 얻었으나 다시 미국으로 가는 탈북자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뉴욕·로체스터·리치먼드/

글·사진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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