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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8.14 21:17 수정 : 2011.08.14 22:37

[한겨레 in] 탈북자의 아메리칸드림
가족위해 사선 넘은 아버지 어머니를 찌르고 목을 맸다
‘새출발 땅’서 그들을 반긴건 굶주림보다 더 냉혹한 현실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는 아들 이장길(가명·24)씨의 귀가는 늦었다. 지난 6월18일 밤 11시, 집에 들어온 이씨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9, 1, 1을 눌렀다. 어머니가 거실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소방차·경찰차·구급차가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 사우스클린턴 애비뉴에 차례로 도착했다. 이씨의 집은 붉고 푸른 경광등에 휩싸였다. 집안을 수색하던 경찰은 다락방에서 목을 맨 아버지를 발견했다. 부부 싸움을 하다 54살 탈북난민 남편이 48살 탈북난민 아내를 흉기로 찌르고 자살했다는 게 경찰 조사 결과였다.

그날 밤, 이씨는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미국 온 지 2년 만이었다. 사건 이후 이씨는 낮밤없이 매일 술을 마신다. 동생 명길(가명·22)씨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 8월 초, 로체스터에서 어렵게 만난 장길씨는 사건 이야기만 나오면 굳게 입을 다물었다. 가족이 겪은 천신만고에 대해서만 말했다.

2007년 여름 두만강을 넘어 탈북한 이장길(가명·24)씨는 2009년 여름 부모와 함께 미국에 도착했지만, 2011년 여름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지난 8월 초,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 거리를 이씨가 바라보고 있다. 이씨의 요청에 따라 얼굴을 가렸다.
죽지 않으려 감행한 탈북이었다. 이씨의 또다른 형제 3명은 북한에서 굶어 죽었다. 남은 아들 둘이라도 대학 보내는 게 아버지의 꿈이었다. 1998년, 아버지는 고향 양강도를 떠나 국경을 넘었다. 중국 공안에 붙잡혀 강제북송당했다. 10년 동안 세차례 탈북하면서 아내와 두 아들을 중국 연변에 데려다놓았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2008년 10월, 4500여㎞ 떨어진 라오스로 향했다. 가짜 신분증을 들고, 기차·버스를 갈아타며 두 발로 산을 넘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김일성, 김정일이 ‘철천지원수’라고 한 나라에 가서 보란듯이 잘 살아 보자.” 2009년 6월, 난민 자격을 얻은 이씨 가족은 라오스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입국 허가를 받아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선 네 식구 모두 일했다. 어머니는 옷공장에서 일했다. 아들 형제는 생선가게에서 일했다. 아버지의 미국 적응은 더뎠다. 아버지는 일을 금세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았다. 안경공장, 세탁소, 생선가게로 옮겨 다녔다. 아버지의 영어 실력은 좀체 늘지 않았다. 부부 싸움이 잦아졌다. 로체스터의 어느 한인은 아버지 이씨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가족도, 교민도 자기를 따돌린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좋게 좋게 사시라고 위로했는데….”

더 나은 삶을 찾아 미국에 간 탈북자는 2011년 현재, 400명 이상이다. 최근 5년 동안 급격히 늘었다. 지난해 미국·유럽 등 제3국행을 택한 탈북 난민 및 망명신청자는 1194명이다. 지난해 한국행을 택한 탈북자는 2376명이다. 탈북자 3명 가운데 1명은 다른 나라로 향하고 있다. 한국에 왔다가 다시 제3국으로 간 불법체류자·망명신청자의 규모를 고려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그중에서도 미국은 2006년 이후 탈북자의 주요 정착지로 떠올랐다. 먼 나라에서도 그들의 삶은 편치 않다. 이씨의 부모는 ‘아메리칸드림’을 미처 펴지 못하고 미국에서 죽었다.

이장길(가명·24)씨 가족이 세차례 탈북을 거쳐 중국 연변에 함께 모인 것은 2007년이다. 네 식구는 움막에서 살았다. 어느 조선족이 개·돼지를 키우는 야산 움막에 이씨 가족을 들였다. 해가 뜨면, 아버지는 두 아들을 데리고 공사판에 나갔다. 철근을 날라 돈을 벌었다. 해가 지면, 어머니는 개죽 끓인 솥에 밥을 지었다. 네 식구의 끼니였다. 식구들은 한국에 대한 불길한 소문을 들었다. “한국에 가면 북에 남은 친척이 위험해진대. 차별도 심하고.” 다른 나라에 대한 좋은 소문도 들었다. “서양 국가엔 복지가 잘 돼 있대.”


“한국은 위험하고 차별도 심해
서양국가는 복지도 잘돼 있대”
탈북난민 인정한 미국행 탈출

원래 탈북자들이 선호한 서양 나라는 유럽이었다. 2000년대 초반, 유럽 각국은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여 받아들였다. 한인들이 많은 영국·독일로 건너가는 탈북자가 생겨났다. 한국에 왔다 유럽으로 건너가는 탈북자도 있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흐름이 바뀌었다. 한국 국적 탈북자의 ‘위장망명’을 적발한 영국 정부가 2000년대 중반 이후 탈북자의 입국 문턱을 높였다. 반면 미국은 2004년 ‘북한인권법’을 만들어 탈북난민 수용을 본격화했다. 이후 탈북자 사이에 ‘미국행 열풍’이 불었다. 이씨 가족도 그 바람을 타고 미국에 왔다.

“북한에 돌아가면 목숨이 위험하니 난민 지위를 주세요.” 2009년 6월, 미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씨는 난민·입국 심사를 더해 10번 이상 면접을 거쳤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난민 심사를 통과하려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말을 꼭 해야 한다는 게 탈북자들의 상식이다. 심사 때마다 라오스 주재 미국대사관 직원이 물었다. “왜 한국이 아닌 미국에 가려고 합니까?” 이씨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미국이 가장 강대국이고, 세상에서 최고인 나라 아닙니까.”

세상 최고의 나라에 오자마자 이씨 가족은 빚을 졌다. 미국행 비행기삯 5000달러를 미국 정부에 갚아야 했다. 1인당 35달러씩, 모두 140달러를 매달 냈다. 미국 정부는 시장주의 방식으로 난민을 지원했다. 각 주나 도시마다 차이가 있지만, 지정된 가게에서 사용하는 ‘식품구입권’(푸드 스탬프)과 입국 초기 3개월 동안 월 200~400달러의 집세 또는 지원금을 주는 것이 미국 정부가 제공하는 금전적 도움의 전부다.

지난 1일, 미국 뉴욕주에서 만난 이장길(가명·24)씨는 이름과 얼굴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다. 다른 도시로 떠나려는 이씨의 봇짐에는 컴퓨터와 몇벌의 옷만 담겨 있었다.
당장 갚아야 할 빚이 있으므로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내려던 아버지 이씨의 꿈은 미뤄졌다. 북한 양강도에서 이씨 형제는 인민학교(한국의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거들었다. 중국 연변에서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공사판에 나갔다. 미국 로체스터에서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시급 6~8달러를 받으며 생선가게에서 일했다.

탈북자의 미국행에는 ‘중개인’(브로커)이 끼어든다. 조선족·한국인·재외동포 등이 합세한 브로커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난민·망명 신청을 하는 탈북자는 거의 없다. 여기에는 비용이 든다. 이씨 가족은 해외 한인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그 비용을 충당했다. 지난 2007년, 아내와 함께 미국에 온 탈북자 배경식(가명·41)씨는 그런 후원을 받지 못했다. 배씨는 아내 몫까지 더해 1인당 3000달러씩, 모두 6000달러의 ‘소개비’를 브로커에게 갚고 있다. 미국 정부에 빚진 비행기삯까지 더해 배씨에겐 날품팔이조차 마다할 여유가 없다. 엔지니어링 전공으로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한 배씨는 미국 시애틀의 어느 공장에서 모터 부품을 점검하는 단순노동을 했다. 라틴계·아시아계 노동자가 모인 공장에서 배씨는 시간당 7달러를 받았다.

‘미국행 탈북비용’은 탈북자의 순조로운 정착을 막아서는 첫번째 장애물이다. 그런 현실을 이장길씨 가족은 잘 몰랐다. 그들이 가진 정보는 보잘것없었다. “영국은 요즘 들어가기 힘들대.” “캐나다는 의료비용이 공짜라던데.” “‘기회의 땅’인 미국에선 일한 만큼 벌 수 있다잖아.” 북한 농촌 지역에서 평생을 살고, 중국 동북 지역에서 단속을 피해 숨어 지낸 이씨 가족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다른 탈북자가 전해준 입소문뿐이었다. 그 소문 속에서 이씨 가족은 ‘아메리칸드림’을 만났다. 임대주택 보증금과 정착 지원금 2000여만원을 지급하는 한국보다 “일한 만큼 벌 수 있다”는 미국에 더 끌렸다. 심지어 “미국은 한국보다 10배 더 많은 돈을 준다”는 뜬소문까지 들었다.

정보의 차이는 정착지의 차이로 이어진다. 한국에 왔다 다시 미국으로 가는 탈북자들은 한인이 많이 사는 서부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반면 탈북 직후 곧바로 미국을 택한 탈북자들은 동부 뉴욕주의 크고 작은 도시에 주로 정착한다. “높은 건물 많은 그 뉴욕을 떠올리면서 무조건 ‘뉴욕주’로 가겠다고 했다”는 탈북자가 많다. 이씨 가족이 사는 로체스터 역시 뉴욕주의 작은 도시다.

이씨 가족의 초기 정착을 도와준 어느 탈북자는 아버지 이씨와 나눈 대화를 기억한다. 일이 힘들다는 아버지 이씨에게 그가 말했다. “중국에서도 힘들게 일했으니, 미국에서도 그런 고생은 견뎌야죠.” 아버지 이씨가 답했다.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잖아요.” 아버지 이씨는 북한·중국에서 겪은 날품노동과 가난을 미국에서 반복하고 있는 처지를 좀체 이해하지 못했다.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을 때, 아버지 이씨는 수용소에 갇혔다 풀려나왔다. “젓가락처럼 말라 수용소 밖으로 버려졌지만, 다시 살아났다”고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그렇게 고생한 것을 미국에서 한번에 보상받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웃 탈북자가 회고했다.

저임 노동이나마 가능한 것은 한인 교회 덕분이다. 로체스터 공항에 도착한 이씨 가족을 마중 나온 것은 한인 교회의 목사와 신자들이었다. 교회에서 만난 한인은 다른 한인이 운영하는 생선가게 일자리를 이씨 가족에게 소개해줬다. 제3국 탈북자에게 한인 교회의 도움은 결정적이다. 그 끈을 놓치는 건 치명적이다.

지난해 뉴욕에 정착한 원만호(가명·51)씨는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다른 탈북자의 말을 믿었다가 갖고 있던 돈까지 잃었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기댈 곳이 없었다. 한인 교회가 그를 구제했다. 교회 소개로 한인 슈퍼마켓에서 채소 정리 일을 시작했다. 원씨에게 한인 교회는 울타리다. 그것에 기대 살아가지만, 그 밖으로 나갈 궁리는 못하고 있다.

북한에 있을 때, 원씨는 자동차 기술자였다. 기술이 있으니 미국 생활에 걱정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영어를 못하는 그를 제대로 써주는 곳은 없었다. 한인 경제권 안에서도 탈북자들은 한국인과 다른 대접을 받는다. 탈북자들이 한인 업주들에게 한인과 똑같은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면 “왜 이리 비싸냐”는 말을 듣는다. 달리 취업할 길이 없는 탈북자는 시장에서 통용되는 임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

지난 6월25일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이씨 부모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피해자인 이씨 어머니의 매장 비용은 미국 정부가 대줬지만, 가해자인 이씨 아버지의 매장 비용은 한인 교회와 이웃 탈북자들이 마련했다. 선교단체 ‘318파트너즈’ 제공
정부지원 적고 브로커비까지
시작부터 빚더미에 날품노동
영어도 못해 임금수준 밑바닥

언어 장벽을 넘는 길은 수월치 않다. 이장길씨는 북한에서 인민학교 4년을 마치고, 중학교 6년 과정 가운데 1년밖에 다니지 못했다. “(해방 직후) 할아버지가 혁명을 하겠다고 남쪽 고향을 버리고 북으로 왔대요. 고향은 남한이지, 아버지는 탈북해서 중국에 있지, 출셋길은 영원히 끊어졌다 생각하고 공부를 안했어요.” 이씨는 성년이 되도록 알파벳을 몰랐다. 미국 도착 뒤, 난민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육 시설에서 알파벳을 처음 배웠다. 인도·네팔·소말리아 출신 난민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그것은 초급 영어였다. 대학 진학을 위한 고급 영어는 이씨 스스로 익혀야 한다.

아버지 이씨는 그 장벽을 넘지 못했다. 아들이 미국인 친구를, 아내가 한인 이웃을 조금씩 사귀어가는 동안, 아버지는 오히려 말수가 줄었다. ‘318 파트너즈 선교회’의 스티브 김 대표는 아버지 이씨가 로체스터 공항에 도착했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이제 나한테는 돈 쓰지 마세요. 한국 사람 안 만나고 영어 실력 쌓아서 미국 사람하고 상대해 돈 많이 벌 테니까.” 김 대표는 “내가 본 탈북자 가운데 가장 자립심이 강하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50대인 아버지 이씨의 영어 실력은 늘지 않았다. 미국 사람과 상대하여 돈을 벌 기회도 없었다. 업종을 바꿔가며 한인 가게에서 점원 노릇만 했다. 아버지 이씨는 “한인 가게에서 일하면 배가 아프고 속상하다”고 종종 가족에게 말했다.

목숨 걸고 왔지만 고된 삶 지속
그래서 일부는 극단적인 선택
자신을 버리고 가족을 잃는다

사회 안전망은 부족하고 함께 어울릴 집단도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미국의 탈북자들은 때로 극단적 선택을 한다. 미국이 ‘북한인권법’을 채택한 이후 난민 자격으로 처음 미국에 들어온 6명의 탈북자가 있다. 그 가운데 1명이 지난해 4월 자살했다. 김기호(가명·36)씨는 한인 선교단체와 탈북자 단체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오랫동안 항우울제를 복용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뉴욕 플러싱 집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미국에 들어온 뒤 4년 동안 슈퍼마켓 등에서 잠깐 일한 것을 제외하면 그에겐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

미국 탈북자의 고립과 좌절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체계적인 조사가 실시된 적은 없다. 그들은 미국 동부·서부의 도시에 흩어져 숨죽여 지낸다. “이씨 부부의 죽음이 교훈을 남겼어요. 겉보기엔 조용하고 평온해 보여도 미국에 온 탈북자 모두 상담이 필요할 정도로 힘들게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지요.” 이씨 가족의 미국행을 도왔던 스티브 김 대표가 말했다.

이역만리에서 부모를 잃은 이장길씨는 한인 교회·선교단체 등의 도움으로 밀린 집세와 장례비용을 치렀다. 이씨 가족은 이제 형제 두명만 남았다. 이씨의 혈육 가운데 한국에 사는 이가 있긴 하다. 남쪽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결혼하여 자식 2명을 낳았는데, 그들을 두고 해방 정국 때 월북해 다시 가족을 일궜다. 남쪽에 두고 온 할아버지의 자식들은 이씨에게 큰아버지뻘이 된다. 이씨는 장차 그들을 찾아 한국에 갈 생각이 있다. 그런 날이 오면 휴전선에도 가보려 한다. 양강도 고향 친구 6명이 북한 인민군에 들어갔다. “6명 가운데 2명은 굶어 죽고 1명은 탈영해서 소식을 몰라요.” 휴전선에 가면 고향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휴전선에 가서 물어보고 싶어요. 왜 이렇게 남북을 막고 있냐고.”

그것은 아직 먼 미래의 꿈이다. 당장은 뉴욕주 로체스터부터 떠나려 한다.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다른 탈북자 몇몇이 살고 있다. 그곳으로 옮겨 자동차 정비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어 대학에 갈 생각이다.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는 동생은 로체스터에 남는다고 했다. 동생은 미군에 입대하여 복무한 뒤, 대학에 가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하나뿐인 혈육과 서로 헤어져도 어쩔 수 없다. “여기에 더 있을 순 없어요. 다 잊고, 새로 시작할 거니까.” 북한을 떠나고 중국을 떠나고 라오스를 떠났던 이씨는 다시 로체스터를 떠난다.

(※ 2회 ‘미국 시민의 꿈’에서는 미국에 정착하려는 탈북 여성·미성년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뉴욕·로체스터·리치먼드/글·사진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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