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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6.01 21:52 수정 : 2011.06.02 09:51


돌아오지 않는강-4대강 사망자 19명 전수조사
② 죄와 벌

살수차 기사가 죽었다
책임자도 산재처리도 없었다
동료 덤프트럭 기사만이 홀로 전과자가 됐을뿐…

사람의 형체가 후방 거울에 비쳤다. 강에서 퍼올린 모래를 강변에 부으러 덤프트럭을 후진하던 강영구는 급히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문을 열고 자기 키만큼 높은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일을 시작하면서 안전교육을 받았다. 공사현장에선 시속 20㎞ 이하로 달리라고 했다. 20년째 트럭을 몰면서 산전수전을 겪었지만, 이번엔 나라에서 하는 공사다. 교육장에서 들은 지침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그가 모는 트럭의 속도계는 10~20㎞를 넘지 않았다.

며칠 뒤 현장 관리자가 그를 불러세웠다. “강씨는 우리랑 잘 안 맞는구먼. 이래선 같이 일 못하겠는데….” 그는 거의 빌다시피 했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이소.” 그날부터 부산 사내 강영구는 시속 30㎞로 공사장을 달렸다. 모래를 고봉밥처럼 가득 실은 덤프트럭은 비포장 도로 위에서 미친듯이 흔들렸다. 트럭 수리비로 한달에 150만원을 썼다. 하루 4000원의 점심값까지 제하면, 그가 손에 쥐는 돈은 월 300만원 정도였다. 한철 공사판에선 기회 있을 때 벌어야 했다. 더 빨리 달려야 했다.

2010년 11월27일 오후, 덤프트럭 기사 강영구의 운이 다했다. 트럭에 치여 사람이 쓰러졌다. 낙동강 14공구 하청업체 부길건설에서 일을 시작한 지 8개월 만이었다.

쓰러진 사람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컨테이너 숙소 바로 옆방에 묵는 안 사장이었다. 살수차 기사지만 부르는 이름은 언제나 ‘사장’이었다. 일주일 전엔 함께 저녁 먹으며 막걸리 한 사발을 나눴다. 안 사장은 말수가 적었다. 대신 허허 잘 웃었다. “사장님, 사장님.” 불러도, 흔들어도 자는 듯 누운 안 사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14공구 사고당시 신호수는 없었다
덤프트럭 기사는 회사를 믿고
“자리를 비웠다”고 말했지만
회사는 철저히 그를 외면했고
사건은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됐다


지난 5월25일 오후 경남 함안군 칠서면 낙동강사업 18공구에서 덤프트럭이 강바닥에서 준설한 모래를 싣고 이동하고 있다. 함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사고 다음날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은 가족사진을 꺼냈다. 2009년 겨울, 아버지는 아들딸, 손주들과 함께 티셔츠를 맞춰 입고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는 가족사진을 찍은 뒤 검은 양복으로 갈아입고 영정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웃고 있다.

사진 밖 아버지는 말없이 누워 있다. 아들 안대식(33)이 경남 김해의 한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맨몸으로 흰 천을 덮고 있었다. 10여분 동안 검안한 의사가 말했다. “내장출혈로 인한 사망입니다.” 옆에 있던 김해 중부경찰서 교통조사계 경찰이 말했다. “현장은 다 치워졌어요.” 아버지가 쓰러져 누운 겨울강가에는 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그래도 현장에 가보시겠습니까?” 유품을 건네며 경찰이 말했다. 아버지의 휴대전화였다.

그것이 아버지의 몇 번째 휴대전화인지 아들은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고철 나르는 덤프트럭을 20년 넘게 몰았다. 공사장이나 고물상에서 고철을 모아 제철회사에 납품했다. 운전석 지붕 위에 올라 짐칸을 정리하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떨어져 고철 틈으로 빠졌다. 그렇게 잃어버린 아버지의 휴대전화가 50여대다.

나이 들어 고철 일이 힘에 부친 아버지는 사고 몇 달 전 덤프트럭을 처분하고 살수차를 샀다. 살수차 기사는 공사장에 먼지가 날리지 않게 물만 뿌려주면 된다. 사고 얼마 전 아버지의 회갑잔치를 조촐하게 열었다. “이건 국가 공사니까 돈 떼먹힐 일은 없어.” 낙동강 14공구에서 막 일을 시작한 아버지가 말했다. 항상 쪼들렸던 식구들이 모처럼 웃었다.

사고 전날 밤 아버지는 모처럼 통화에서 역정을 냈다. 아버지를 따라 덤프트럭을 몰다, 이제 목수 일을 하는 아들은 퉁명스레 전화를 끊었다. 잔소리가 귀찮았다. “나이가 서른셋이나 됐는데, 왜 결혼을 안 하는 거야.”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됐다. 아버지의 죽음은 산업재해가 아닌 단순교통사고로 처리됐다. 아버지를 친 덤프트럭 운전기사만 입건됐다. 현장 책임자 등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경북 청도 출생. 경남 김해 낙동강 14공구에서 살수차 기사로 일했다. 1남2녀와 4명의 어린 손주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건설사와 합의할 때, 산재처리를 하지 않고, 민사상 책임도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고 아들은 설명했다. “장례식장에서 (회사 관계자) 만나고, 장례식장에서 합의 보고, 장례식장에서 모두 마쳤다”고 아들은 말했다. “법정으로 가도 질 게 뻔하니까, 시간을 끌면서 출상 못하는 일이 싫었다”고 아들은 말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일한 덤프트럭 기사를 용서하진 않았다.

트럭만 20년을 몬 강영구는 영정 앞에서 두 차례 절했다. 상주에게도 절했다. “정말 미안합니대이. 정말 미안합니대이.” 상주는 고개를 외로 돌렸다. 이튿날 다시 빈소를 찾았다. 안주머니에 봉투를 품었다. 2천만원을 봉투에 담았다. 자신이 번 돈에 칠순 노모가 배추밭·파밭에서 날품을 팔아 하루 3만5000원씩 받아 모은 돈을 합쳤다. 그렇게 많은 돈을 손에 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며칠 전 피의자 신문을 받으러 경남 김해 중부경찰서에 갔을 때 담당 경찰이 말했다. “유족과 합의 못하면 구속될 수도 있습니다.”

그에겐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이 있다. 마흔셋의 강영구는 열살 아래인 상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못나서 모은 돈이 이것밖에 없소. 한번만 봐주소.” 상주는 반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무릎 꿇는 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 돈이 무슨 소용입니까?”

교통사고 피의자 강영구는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합의금으로 마련한 2000만원 가운데 600만원을 떼어 변호사를 선임했다. 공탁금으로 1000만원을 걸었다.지난 3월11일 창원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10분 만에 끝났다. 판사는 강영구에게 금고 1년,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했다.

지난 5월 말까지 그는 부산의 한 요양병원에서 매일 8시간씩 청소하며 사회봉사를 마쳤다. 그와 계약했던 건설사는 다시 일을 주지 않았다. 노모가 밭일로 식구들을 먹여살렸다. 죗값이었다. 숨진 이에 대한 죗값을 오직 혼자 치렀다.

사고가 난 2010년 11월27일 이후, 그는 매일처럼 술을 마신다. 소주잔을 비울 때마다 원망이 늘어난다. “삑삑삑, 삑삑삑만 있었어도….” 그의 덤프트럭은 후진 경고음 시스템이 고장나 있었다. “내 잘못이긴 하지만…, 그거 고쳐 오라고, 안전점검 받으라고 회사에서 한번만 말했어도….” 원망은 건설사를 향한다. “사고 현장에 신호수가 없었지만, ‘원래 배치돼 있다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하면 장차 일을 회사가 도와줄 거라 생각했다. 그의 진술은 이 사건을 산재가 아닌 교통사고로 처리하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하청업체인 부길건설 쪽은 이를 부인했다. “원래부터 신호수가 있었고, 강씨에게 거짓 진술을 시킨 적은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사고 현장의 진실을 누군가 봤겠지만, 목격자 진술을 위해 나서는 현장 노동자는 아무도 없었다. 원청업체인 대아건설은 이번 사건에서 물러나 있다. 강영구도 원청기업을 찾아간 적이 없다. 큰 회사는 덤프트럭 기사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60대 살수차 기사가 죽었고, 30대 목수는 용서하지 않았으며, 40대 덤프트럭 기사는 전과자가 됐다.

박수진 유신재 기자 jin21@hani.co.kr

※ 3회 ‘목숨과 바꾼 포클레인’에서는 생계 수단인 중장비를 건지려다 익사한 노동자의 사연이 이어집니다.


이들의 죽음을 ‘교통사고’라 불러야 하나

금강 포클레인 기사도… 낙동강 신호수도…공사현장서 참변


김정태씨는 1982년 광주에서 포클레인 일을 시작했다. 포클레인을 7대까지 늘리며 사업을 키웠으나 부도가 났다. 모두 처분하고 전국을 돌며 남의 차를 탔다. 2008년 파산을 신청한 뒤 빚쟁이들이 현장에 올까 걱정돼 남의 면허증을 도용해 일했다. 돈을 많이 주는 야간 작업만 골라 했다. 월급은 통째로 집에 부쳤다.

지난 3월부터 충남 청양군 금강 6공구에서 하루 10시간씩 일했다. 김씨가 숨진 4월18일은 일하기로 계약한 마지막날이었다. 다른 포클레인 기사의 휴대전화를 빌려쓴 뒤 자신의 차로 돌아오던 중 박아무개(36)씨의 덤프트럭에 치여 숨졌다. 사고 당시 그의 지갑엔 현금 2000원과 다른 사람 이름의 면허증만 있었다. 차주가 월 40만원을 주고 얻어준 모텔방에는 봄 꽃놀이 가기로 약속하고 아내와 색깔을 맞춰 산 점퍼가 상표도 떼어지지 않은 채 걸려 있었다.

김씨가 죽자 덤프트럭 기사 박씨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박씨는 사고 1년 전부터 금강 6공구를 드나들었다. 사고 직후 일주일 동안 집밖에 나가지 못했다. 광주역 앞에서 유족과 합의했다. 유족의 침통한 표정을 본 뒤 다시는 금강 공사현장 근처에 가지 못했다. 매달 400만원씩 갚아야 하는 덤프트럭 할부기간은 아직 1년이 남았다. 9살·7살짜리 두 딸과 4살짜리 아들을 위해 다른 공사현장을 알아보고 있다.

김상규씨는 경남 김해시 낙동강 11공구에서 신호수로 일했다. 지난해 10월28일 오후 1시20분 후진하던 안아무개(32)씨의 덤프트럭에 치여 숨졌다. 김씨를 숨지게 한 안씨는 결혼을 보름 앞둔 예비신랑이었다. 안씨는 신부에게 차마 사고 소식을 알리지 못하고 결혼식장에 섰다. “일을 해야 잊혀진다”는 동료의 말에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고, 지난 4월22일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4대강 사망사고는 노동자 책임?


4대강 사망사고는 노동자 책임?
4대강 공사현장에서 노동자가 죽으면 그 책임은 또다른 노동자에게 돌아간다. 공사현장에서 덤프트럭을 몰다 다른 노동자를 치어 숨지게 한 운전기사 5명은 사건 직후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사고 책임을 덤프트럭 기사에게 묻지 못하는 경우, 당국의 수사는 더디 진행된다. 경찰청이 민주당 이석현 의원에게 최근 제출한 자료를 보면, 지난 2월 이후 발생한 사고 8건 가운데 6건이 여전히 수사중이다. 죽음에 책임질 사람이 아직도 불분명하다. 경찰의 수사가 끝나 검찰이 기소한 나머지 2건의 가해자는 덤프트럭 기사들이다.

4대강 사망사고 18건 가운데 지금까지 경찰 또는 노동부가 건설사 법인이나 현장소장을 입건한 것으로 확인된 것은 6건이다. 그러나 입건 이후 건설사가 어떤 책임을 지게 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아직 협상중이거나 협상 내용이 확인되지 않은 4건을 제외한 사망자 15명의 유족들 모두 “향후 어떤 명목으로도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포함된 합의서에 서명했다. 박수진 유신재 기자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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