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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5.17 20:02 수정 : 2011.05.18 09:57

매주 금요일 낮 서울 한남동 이슬람 서울중앙성원에서는 ‘주마’(금요예배)가 열린다. 지난 4월22일 아빠를 따라온 어린이 무슬림이 성원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며 웃고 있다.

[한겨레in] 한국의 무슬림 ② 알리 형제의 사춘기
(‘코슬림’ : 한국인 무슬림 2세)

※ 지난회 : 항상 히잡을 쓰는 신미선씨는 파키스탄 출신 귀화자와 결혼했다. 윤알리야씨는 미국 유학 시절 무슬림이 되어 한국에 돌아와 터키 출신 무슬림과 결혼했다. 장동현씨는 인도네시아 산업연수생과 결혼했다. 한국에는 14만명의 무슬림이 산다. 4만5000명은 귀화·토착 한국인이고, 나머지는 체류·이주 외국인이다. 국제결혼을 통해 무슬림 인구는 계속 늘어난다. ‘모태 신앙’이 이슬람인 아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맞짱’이므로 야단맞지 않을 것이다. 일대일로 맞붙는 ‘맞짱’은 누구도 선생님한테 일러바치지 않는다. 학생들의 불문율이다. 알리 하룬은 충분히 경고했다. “하지 말라고 했지.” 상대는 멈추지 않았다. “너희 나라로 가라니까, 왜 안 가니?”

 급식 시간이면 남자애들이 고기 반찬을 뺏어갔다. “어차피 넌 안 먹잖아.” 손이라도 스치면 여자애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휴, 더러워.” 모두 참았으나, 이제 새로운 시비다. 녀석은 똑같은 말로 거듭 놀렸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데, 자꾸 가라고 하니까, 가고 싶지 않은데, 자꾸 가라고 하니까….”

 지난해 일을 떠올리며 16살 알리는 잠시 고개 숙였다. “내가 발로 차버렸어요.” 그 말을 하며 비로소 웃었다. 녀석의 옷은 찢어졌고, 알리가 이겼다. 불문율대로 아이들은 알리의 승리를 선생님한테 일러바치지 않았다. 알리가 당한 놀림도 이르지 않았다. 알리는 울지 않았다.

 8년 전에도 알리는 울지 않았다. 무역업을 하는 아빠를 따라 한국에 왔을 때, 알리는 고향 파키스탄의 즙 많은 망고를 더이상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린 동생을 건사하는 일이 제 몫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였다. 6살 남동생, 4살 여동생을 양손에 꼭 잡고 부천역에서 서울 시청역까지 1시간씩 지하철을 타고 외국인 한글학교에 다녔다. 그때 알리는 8살이었다. 어린 알리는 “거기 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꾸란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


 최근 일부 학계에서는 한국 이주 무슬림의 자녀를 ‘코슬림’(Koslim)이라 이름붙였다. 한국 무슬림 인구 가운데 특히 이주 무슬림 1.5세대와 2세대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다. 코스림은 2000년대 이후 본격 증가했고, 현재 약 4000명이 한국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매일 새벽 꾸란을 낭송하는 알리는 낮 예배 장소를 찾고 있다. 또래보다 2년 늦은 올해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가 파하면 오후 4시다. 초등학생 때는 집에 가서 낮 예배를 했다. 이젠 불가능하다. “기도 안 하면 마음이 아파요.” 친구들이 눈치 주지 않는 곳에서 딱 3분만 혼자 있으면 된다. 학교 구석에는 책상·걸상을 아무렇게나 쌓아둔 창고가 있다. “점심시간에 거기 가서 기도해도 괜찮을까요?” 알리는 속으로만 수백번 되뇌었다. 선생님한테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송경화 안수찬 기자 freewha@hani.co.kr

이슬람 서울중앙성원 부설 유치원인 프린스 술탄 스쿨 원생들이 유치원 버스에 올라타고 있다. 사우디 정부의 후원으로 건립된 이 유치원에는 부모 모두 한국인인 7명의 아이를 포함해 모두 50명이 다니고 있다.

무슬림 부모의 아이는 무슬림으로 자란다. 뱃속에서부터 듣던 꾸란을 매일 공부하고, 매일 기도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차가운 눈길을 피해 집에서만 무슬림으로 산다.

우리나라 친구들아, 날 칩떠보지 마

장동현(35)씨는 몇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이 순간을 위해 아랍어를 한글로 적어 외우고 또 외웠다. 아이는 빨갛고 작고 눈부셨다. 북받치는 수만가지 감격의 언어를 참았다. 출산 전부터 아내가 신신당부한 일이 있었다. 아빠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아빠는 아이의 머리가 서북서쪽을 향하도록 안았다. 메카 방향이다. 아이는 가냘프게 떨며 울었다. 아빠는 아이의 오른쪽 귀에 ‘아잔’(예배를 알리는 낭송)을, 왼쪽 귀에 ‘이까마’(예배 직전 낭송)를 불러줬다. 아빠의 낭송은 이렇게 시작했다. “알라후 악바르, 알라후 악바르.” 모든 새 생명은 신의 말씀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한다고 무슬림은 믿는다. “하나님은 위대하다”는 말을 들으며 지영이는 세상에 태어났다.

 아이에겐 근심이 없고, 좋고 싫은 것만 있다. 3살 지영이는 아빠의 시계에서 울리는 ‘살라’(기도) 시간 알람을 좋아한다. “모야? 모야?” 하루 5차례 알람이 울릴 때마다 아이는 알람의 영문을 물으며 아빠 곁을 파고든다. 아이가 싫어하는 것은 돼지다. “꿀꿀돼지, 싫어. 꿀꿀돼지, 안 먹어.” 아이는 엄마가 일러준 대로 어린이집 교사들에게 말했다.

 엄마 아리아나 따리(33)씨는 뱃속의 지영에게 꾸란을 읽어줬다. 꾸란에선 돼지고기를 금한다. 돼지 피·기름이 들어간 음식도 안 된다. ‘할랄’ 고기(이슬람 방식으로 도살한 고기)가 아니라면 쇠고기·닭고기도 먹지 않는다. 지영이네는 진라면만 먹는다. 진라면의 분말스프엔 돼지고기 성분이 없다. 지난 4월 ‘할랄’ 신라면 생산이 시작됐는데, 오직 수출용이다. 수출용 ‘할랄’ 초코파이도 있는데, 역시 한국에선 구할 수 없다. 한국 기업은 외국 무슬림을 위해 수출은 해도, 국내 무슬림을 위해 생산하진 않는다. 한국의 무슬림은 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한 할랄 음식을 무슬림 식료품점에서 사먹는다.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만나 결혼한 부부는 금 가지와 옥 나뭇잎 같은 딸을 무슬림으로 키운다. “엄마 아빠 무슬림이면 아기도 자동으로 무슬림이에요.” 따리씨가 말했다. 따리씨는 고향 인도네시아에서 어린이용 꾸란을 사왔다. 5살이 되면 지영에게 아랍어를 가르칠 것이다. 8살이 되면 방학 때마다 인도네시아 무슬림 학원에 보낼 것이다. 한국 학교에서도 경건한 무슬림의 삶을 가르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라고 따리씨는 생각한다.

 2003년 한국에 귀화한 무함마드 아심(36)씨는 한국에 이슬람 학교를 차렸다. 한국인과 결혼해 2남2녀를 둔 무함마드씨는 정규 교과과정까지 무슬림 방식으로 가르치고 싶었다.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 10여명을 모았다. 보증금 3000만원, 월세 100만원을 주고 인천의 어느 건물을 빌렸다. 파키스탄에서 이슬람 학자도 데려왔다. 교육청에 정식 대안학교 인가를 신청했다. 허가는 나지 않았다. 1년 만인 2007년 말 학교는 문을 닫았다. 무함마드씨는 무슬림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파키스탄으로 유학 보냈다. 유학이 끝나면 아이들은 한국에 돌아와 직장을 구할 것이다.

 “우린 완전히 우리나라에서 살 거예요.” 16살 알리가 말했다. 알리에게 ‘우리나라’는 한국이다. 파키스탄은 ‘거기 나라’로 부른다. 알리에게 ‘완전하다’는 말은 파키스탄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동생 모하스는 이번 여름방학 때 고향 찾을 생각에 들떠 있다. 아빠를 따라 한국에 온 지 8년 만에 처음이다. 형 알리가 나중에 비밀을 말해줬다. “여름방학 때 못 가요. 아빠가 아직은 안 된다 했어요. 겨울방학 때나 갈 수 있을까. 모하스는 아직 몰라요. 알면 울 거예요.”

학교에선 “땅거지”라 놀림당하고 급식땐 밥과 김치밖에 먹을게 없다. 숙제는 혼자 해가기 어려워 결국 다 못해 혼나기 일쑤다. 좋아하는 여학생도 있지만 고백은 못했다.

 알리 형제가 그리운 것은 무슬림을 칩떠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형제는 그런 눈길을 피해 집에서만 무슬림으로 산다. 형제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새벽 기도를 하고 6시30분까지 꾸란을 낭송한다. 학교를 다녀오면 오후 기도를 하고, 해가 지면 저녁 기도를 한 뒤 꾸란을 낭송하고, 드라마 <웃어라 동해야>를 보고, 잠들기 직전 밤 기도를 한다. 경기도 부천에 있는 알리 집을 찾았을 때 알리의 엄마는 남자 기자와 대면하지 않았다. 외간남자가 집 밖에 나갈 때까지 엄마는 등을 돌리고 부엌에 앉아 있었다. 손님에게 내놓은 닭요리는 알리가 들고 왔다. 밥상에는 수저가 없었다. 알리는 오른손으로 고기를 집어 먹었다. “파키스탄 차는 식기 전에 먹어야 한대요.” 부엌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말을 알리가 통역했다.

 알리네 집에서 한국말을 제일 잘하는 것은 동생 모하스다. 또래보다 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간 14살 모하스는 올해 5학년이다. 형 알리에겐 외국어 뉘앙스가 남아 있지만, 모하스는 한국 사람과 전혀 다름없이 말한다. 귀화하려는 아빠는 한국어 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지고 있다. 엄마가 할 줄 아는 한국말은 “감자 있어요?” 정도다. 한국말 잘하는 모하스는 친구들의 놀림도 금세 알아챈다. “글쎄, 나더러 ‘땅거지’라잖아요.”

 모하스는 매일 교실에서 일어선다. “숙제 안 한 사람 일어서.” 매일 아침 숙제 검사를 하면 모하스는 항상 일어선다. 숙제를 하고 싶지만 어려워서 못한다. 도와줄 사람은 마땅치 않다. 한국 중고 복사기를 파키스탄에 내다파는 아빠는 꾸란 공부만 챙긴다. “해야 돼요. 귀찮을 때도 있지만, 아빠가 꼭 하라 그랬어요.” 모하스의 집에는 책이 거의 없다. 부엌 찬장에 넣어둔 꾸란 몇 권이 전부다. 꾸란 공부를 할 때는 접시로 꾸란을 받쳐 내온다. 꾸란은 땅에 떨어뜨리면 안 된다.

 지난 3월20일 미국 목사가 꾸란을 불태웠을 때 유럽과 미국의 무슬림 2세들은 거리에 나와 종교 차별·박해를 항의했다. 지난 2월 한국형사정책연구 논문집에 ‘국내 자생테러 발생 가능성’에 대한 글이 실렸다. 이주 무슬림 1세대보다 2세대에 주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유럽·미국의 경우 청소년기에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성인이 되어서도 소외당한 무슬림 2세대가 종종 사회불안 요소가 된다고 논문은 분석했다. “편견과 차별을 줄이고 포용해야 한다”고 박철현 동의대 교수는 논문의 결론을 맺었다. 모하스가 살아갈 미래의 한국이 그 길을 택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런 거 몰라요.” 여자친구 따위 관심도 없다고 모하스는 처음에 말했다. 이슬람은 결혼을 목적으로 하는 남녀 교제만 허용한다. 그저 만나고 헤어지는 연애는 상상할 수 없다. 두번째 만났을 때 모하스는 털어놓았다. “사실은…” 모하스는 씩 웃었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어요.” 공부 잘하고 얼굴도 예쁜 한국 여학생이다. 아직은 고백하지 못했다.

 한국인 윤알리야(36)씨도 가슴에 담아둔 고민이 있다. 5살 딸 젠나가 장차 한국 사람 가득한 한국 학교에 잘 적응할지 윤씨는 확신이 없다. “젠나의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아요.” 윤씨가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과 다르면 존중하지 않으니까요.” 미국 유학 시절 알게 된 한국인 무슬림 친구가 있다. 뉴욕에 살고 있다. 친구의 아들은 급식 시간에 할랄 고기를 먹는다. 채식 식단도 따로 있다. 한국의 초중고교 식단에 무슬림이나 채식주의자를 위한 배려는 없다. 명지대 중동연구소 안정국 교수는 2009년 말 통계 기준으로 국내 무슬림 결혼이주자의 자녀가 4000명 정도인 것으로 추산한다. 대부분 미취학 아동이다. 무슬림 이주·귀화자가 늘어나고 있으므로 무슬림 2세의 증가도 피할 수 없다. 그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알리 형제처럼 밥과 김치만 먹게 될 것이다.

 젠나는 할랄 급식이 나오는 한국이슬람중앙성원 부설 유치원에 다닌다. 젠나 또래 50명이 있는데, 7명은 한국 부모 아래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아이들이다. 이 가운데 4명은 부모 모두 무슬림이다. 한국에는 이주 무슬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젊은 한국인 무슬림이 많이 늘었어요.” 미국 유학 시절 무슬림이 된 윤씨가 말했다. 이젠 무슬림이 한국에 유학 온다. 인터넷으로 외국인 무슬림도 만날 수 있다. 중학생 이승미(가명)양은 지난해 여름 미국 무슬림을 채팅으로 만났다. 15살 소녀는 채팅으로 ‘샤하다’(신앙고백)를 하고 무슬림이 됐다. 한국에서 무슬림으로 살아가는 고단함을 그는 자처했다.

※ 3회 ‘마스지드의 청춘’에서는 10~20대 한국인 무슬림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송경화 안수찬 기자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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