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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2.02 21:08 수정 : 2010.02.02 21:08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② 나가사키 해상 귀신섬에 끌려갔던 사람들
나중엔 절에 맡겨져 방치
민단→사찰→납골당 이동

일본 패전 후 동포들이 조직한 대표적 단체로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이 있었다. 좌익계가 주도한 조련은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귀국을 돕는 한편, 강제노역을 했던 동포들의 미불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 기업들과 교섭을 벌였다. 우리말 교육을 받지 못했던 2세들의 교육을 위해 각지에 민족학교를 세우는데도 조련의 역할이 컸다.

점령군사령부는 조련 지도부에 일본공산당과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는 점 등을 구실 삼아, 1949년 9월 조련을 ‘폭력주의적 단체’로 규정해 해산을 명령했다. 조련이 갖고 있던 건물 등 자산은 모두 일본 법무성 지시로 압수됐다. 조련 나가사키지부의 자산도 나가사키시현 당국에 압수됐다. 당시 경찰이 압수한 물품 중에는 조련 간부들이 보관해온 동포들의 유골도 있었다. 유골 상자를 통째로 들고 갔다고 한다.

현 당국은 유골상자를 청사 창고에 두기가 꺼림칙했던지 죠쿄인이라는 사찰에 50만엔을 주고 맡겼다. 이 절은 67년께 유치원을 지을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이상 유골을 보관하기 어렵다는 뜻을 현 당국에 전했으나, 답변이 오지 않았다. 죠코인에 조선인 유골 150여위가 있다는 소식은 오카 마사하루 목사에게도 전해졌다. 유골 중에는 원자폭탄 투하 때 사망한 사람의 유골도 있었다. 오카 목사는 남북이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어느 한쪽에 유골을 보내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유골 관리책임을 사원의 호의에 떠넘기고 있는 정부의 태만과 무책임에 항의하기 위해 시민의 손으로 납골당을 건설하기로 하고 모금 활동에 들어갔다.

오카 목사의 구상에 총련은 동의했지만 민단이 반발했다. 그가 이끌고 있는 ‘나가사키 재일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 이 총련의 앞잡이라고 오해를 한 것이다. 지역의 민단 활동가들은 죠코인으로 트럭을 몰고 와 유골을 인연이 있는 사찰로 가져갔다. 민단 본부는 일본 전역에서 유골을 모아 73년 목포의 납골당에 안치했다. 유골은 85년 10월 망향의 동산으로 다시 옮겨졌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유골의 이동경위는 기구했다.

오카 목사가 모금한 돈은 79년 8월 나가사키 평화공원 안에 원폭조선인희생자 추도비를 세우는데 사용됐다. 해마다 8월9일 오전 7시30분 비 앞에서 조선인 원폭희생자 추도행사가 열린다.

김효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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