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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04 14:17 수정 : 2010.01.04 14:17

팬클럽의 힘 세상을 흔들다

오빠들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철부지가 아니다
기획사의 권력에 맞서 싸운다
그러나 과도한 집단의식이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리기도 한다
 

내가 처음으로 팬클럽의 세상을 알게 된 것은 2000년 초 문화연대가 주도한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운동 때였다. 국회에서 열린 가요순위 프로그램 관련 공청회가 끝난 후 자리를 가득 메운 서태지 팬클럽에서 폐지운동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곧이어 이승환 팬클럽, 블랙홀 팬클럽의 참여가 이어졌다. 이후 운동이 연예·오락 프로그램 개혁운동으로 확대되었을 때에는 지오디 팬클럽도 동참했다.

이들은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를 요구하는 서명운동, 방송사 앞 1인시위, 연예·오락 프로그램 모니터링, 한국 라이브문화 보고서 작성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대중문화운동의 주체로 등장했다. ‘팬덤’(팬클럽 현상)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이들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을까? 지상파 방송의 가요순위 프로그램은 차례로 폐지되었다. 전세계 대중음악의 장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팬클럽의 난’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평소 ‘오빠’들이나 졸졸 따라다니는 철부지 아이들로 간주되던 팬클럽은 특정한 상황이 되면 가장 역동적인 문화소비자 그룹으로 변한다. 지오디 팬클럽은 기획사의 일방적인 공연장 변경에 항의해 결국 대대적인 음향시설 보완을 이끌어냈다. 서태지 팬클럽은 아직도 한국음악저작권협회와 장구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동방신기의 부당한 전속계약에 항의하는 팬들의 신문 광고와 12만명의 서명자가 포함된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서 운동이 이어졌다. 투피엠(2PM) 박재범의 한국 비하 발언 파문이 겉잡을 수없이 번졌을 때, 투피엠 팬클럽은 재범을 지키려는 전방위 활동을 벌였다.


팬클럽의 열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서태지 팬클럽의 한 고등학생은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 서명을 900명에게서 받아왔다. 지오디 팬클럽은 공연장 이전에 항의하는 광고를 싣기 위해 불과 일주일 만에 7천만원을 모으기도 했다. 그런 놀라운 열정은 스타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 탓도 있겠지만, 스타를 매개로 형성된 그들만의 집단적 동질감 때문이다.

특히 아이돌 팬클럽의 결속력은 지속적인 오프라인 행사 참여와 꺼지지 않는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으로 거의 24시간 동안 재생산된다. 때로는 그런 집단의식이 너무 단단해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을 보일 때도 있다. 오빠들의 잘못을 옹호하는 집단의 논리가 이성을 상실한 경우도 있고, 일상의 가이드라인이 붕괴되어 스타의 행적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이른바 ‘사생팬’을 낳기도 한다. 국위를 선양하는 글로벌 스타의 맹활약을 접할 때에는 통제할 수 없는 애국주의에 몰입한다.

한국에서 팬덤은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적극적인 문화소비자로 나서기도 하다가 지나치게 편협한 이기적 행동에 매몰되기도 한다. 민주노총보다 더 강력한 대오를 형성하다가도, 일정한 국면이 지나면 지극히 개인주의적 성향을 드러낸다. 그들은 2008년 촛불시위의 한 도화선이기도 했지만 ‘명박산성’이 등장한 후에는 정치적 바리케이드의 최전선에서 퇴각했다.

팬덤의 열정과 광기를 보면서 한국사회의 역동적인 문화 에너지와 공포스러운 편집증세를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팬덤의 편집증세 안에는 한국 사회의 살벌한 입시교육,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문화적 다양성이 실종된 획일적인 소비문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대안과 희망이 소멸하는 우리 사회에서 팬덤의 열정은 미련을 남긴다. 비록 자신이 좋아하는 오빠들에 연관된 일이지만, 부당한 권력이 행사될 때 이에 맞서는 순수한 힘은 사회적 정의의 원천을 배우게 한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스타를 보고 마냥 행복해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가 어느 순간 잃어버린 ‘인간애’에 대한 에피소드를 보는 듯하다.

웃음과 희망이 부질없어 보이는 시대에 행복해지고 싶다면 당신도 한번 팬클럽의 일원이 돼보라. 우리에게는 스타를 좋아하는 팬클럽만 있는 게 아니라 스포츠, 여가, 책, 자연을 좋아하는 팬클럽도 있다. 단 한번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그 무엇에 미쳐본 적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일이 아닐까?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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