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60년 화해 10년]브루스 커밍스 인터뷰
덩샤오핑도 “북 개방 필요”…DJ·정주영 통일방식 옳아
올해는 한국전쟁 60돌을 맞는 해다. 또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지 10돌이 되는 해다. ‘6·25 동란’ 또는 ‘6·25사변’으로 불렸던 한국전쟁은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중국이 처음 맞선 전쟁으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첫 충돌이란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이후 냉전이 시작됐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반공의 기치 아래 독재체제가 이어졌고 1961년, 1980년의 거듭된 군사 쿠데타도 이런 배경에서 가능했다. 평양 대폭격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체제가 이어지면서 지금까지 전시동원 체제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국내의 객관적인 한국전쟁 연구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초기 저서들은 대부분 외국 학자의 것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연구는 커밍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커밍스의 영향이 독보적이었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980년대 이후 한국전쟁 연구는 사실상 ‘커밍스 콤플렉스’와 ‘커밍스 알레르기’가 대결하는 양상이었다”고 말할 정도다.
커밍스의 연구는 반공주의 시각에 치우친 전통주의 연구의 평면성을 넘어서, 식민지와 냉전, 계급 갈등이라는 전쟁의 구조적 기원으로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 연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부에선 그를 북침설에 동조하는 친북학자로 오해하기도 했지만, 커밍스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제기한 것은 북침설이 아니라 ‘남침 유도설’에 가깝다. 1990년대 공산권 기밀문서가 공개되고 소련·중국·북한의 계획에 의한 선제남침설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자리잡으면서 그의 남침 유도설도 설득력을 잃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누가 처음 방아쇠를 당겼는지보다 전면적 충돌을 낳은 역사적·구조적 요인이 중요하다는 학문적 신념을 철회하지 않고 있다. 커밍스의 영향을 받았던 진보적 연구자들도 199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 나라의 사료를 교차분석하거나, 전쟁의 기원이나 전개과정보다 전쟁의 유산과 영향이란 차원으로 연구 방향을 다각화하고 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브루스 커밍스 교수(오른쪽)가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안숙 <한겨레> 시카고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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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뒤 소련-미국 지원한게 불행 씨앗 - 당신은 특별히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책임을 강조했다. “미국인들 중 미국이 한국을 점령하고 미 군정을 실시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미국인들은 (미국의) 독일과 일본 점령만 알 뿐이다. 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른다. 그들은 전쟁이 1950년에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미국이 이승만과 같은 애국자들이 남한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느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봉사한 이들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본질이지만, 그건 매우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이런 배경들이 전쟁을 야기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미 군정은 좌익, 노동조합, 인민위원회, 여성조직 등을 탄압했고, 나중에 이는 제주 항쟁과 여수 항쟁으로 집약됐다. 이는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미국이 깊은 책임을 갖게 되는 또다른 예다. 역사학자들이 책을 쓸 때, 학자들은 현존하는 책, 문서들을 살펴봐야 한다. 내가 81년에 출간된 첫번째 책을 쓸 때, 거의 모든 책들이 북한과 소련을 비난했다. 미국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몰랐고, 말하지도 않았다. 나는 다행히 미 군정 시기 비밀문서들을 볼 수 있는 첫번째 비정부기관 연구자였다. 그 문서들은 70년대에 공개됐다. 나는 그 기록들을 10년간 살펴봤다. 그래서 나는 내 판단에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몰랐던 문서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이성적인 사람이 그런 문서들을 읽는다면, 그들이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라고 믿는다. 내 첫번째 책의 의도 중 하나는 ‘균형’이었다. 현존하는 모든 책들이 김일성을 비판할 때였다.” - 당신은 한국전쟁에서 일본 강점기의 영향을 많이 강조했는데, 일본 강점기가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은 뭔가? “(일제강점기는 한국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유일 원인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다. 제국주의 기간동안 한국인들은 한국인과 싸웠다. (일본 강점기에) 경찰의 절반은 한국에서 미움을 받았다. 식민국가의 경찰 중 절반은 한국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대학 교수인 내 친구 사라 서가 최근 위안부로 불리는 성노예에 대한 훌륭한 책을 펴냈다. 사라 서는 많은 한국인들이 위안부 모집에 관여했다는 걸 파악했다. 일본인들을 미워한 한국인들은 일본에 부역한 (이런) 한국인들과 싸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역이 매우 만연했다는 거다. 또 일본은 한국을 인력자본으로 이용했다. 수백만명의 한국인들을 산업현장, 광산, 징용 등으로 보냈다. 약 10만명의 한국인 청년들이 군에 끌려갔다. 또 한국인들의 20%가 이동했다. 빈곤, 징용 등으로 만주, 일본, 한반도 북쪽 등으로 갔다. 이주한 한국인들의 삶은 안정되지 못했고, 부조화와 불안을 야기했다. (해방이 되자) 45년에 (일본군에 있었던 한국인) 군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첫번째 책에서 나는 여기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왜냐하면 한국 민중들은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언짢게 생각했다. 그들은 돌아와서 정치 활동에 관여했고, 40년대 후반 많은 소란을 야기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한국인들을 이용했다. 대만도 일본 식민지였다. 그러나 대만인들의 이동은 (한국인들에 비해) 매우 적다. 45년 일본에는 3만5000여명의 대만인만 있었을 뿐이다. (이에 반해) 한국인은 200만이 넘었다. 또 대만인들 상당수는 학생이거나 전문가들이었다. 일본은 한국의 인력을 광산 또는 군, 또는 성노예로 사용했지만, 대만인을 이용하진 않았다. 한국여성 1만여명이 성노예로 끌려갔다. 1920년대 일본은 3·1 운동의 여파로 유화책, 소위 ‘문화 통치’ 정책을 썼다. 이때 김성수가 동아일보를 시작하는 등 한국에서 신문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이) 사업을 시작하고, 책을 쓰고, 결과적으로 독립의 밑바탕을 준비하는 게 가능해졌다. 그러나 30년대에 (일본은) 다시 강경책으로 선회했다. 일본에 종사했던 이들이 해방 이후 미움을 받게된 건 이때부터다. 북한은 종종 한반도 분단과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일본을 고발한다. 오랫동안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은 (강점기 한국인) 분열책을 썼고, 이는 45년부터 50년까지(해방 이후)의 혼란을 야기하게 했다. 일본은 한국의 산업, 도로, 철도 등을 구축한 식민지 개척자이기도 하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한 것과는 비교된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 네델란드는 인도네시아에 아무 것도 건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자본을 (한국에) 가져왔고, 한국에 자본주의를 소개했다. 일본은 일본이 미개발된 한국을 발전시켰다고 말한다. 초가집에 있던 농부들을 노동자, 광부들로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나는 오랜 기간 일본 식민주의에 영향을 미친, 일제치하에서 진행된 개발과 미개발을 강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물음이다.” 한국전쟁은 ‘국제전 성격을 지닌 내전’
내전 아니라면 소련 붕괴때 북도 붕괴 - 그렇다면, 전쟁의 성격면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내전(Civil War)인가, 아니면 국제전(International War)인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대부분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쟁을 내전으로 본다. 미국인들은 베트남에 국제문제가 개입된 걸 도외시한다. 한국전쟁에 대한 온전한 역사를 안다면, 한국전쟁 또한 내전으로 바라볼 것이다. 일본은 일제강점기동안 분열책을 썼다. 한쪽은 김일성, 다른 한 쪽은 김석원 같은 이들로 나눠. 그때 미국과 소련이 진주했다. 나는 아직도 한국전쟁의 적절한 정의는 ‘국제적 세력이 개입된 내전’으로 본다. 만일 내전이 아니라면, 북한은 소련이 붕괴됐을 때 같이 붕괴했을 것이다. 또 북한이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20년동안 지속됐다는 건 북한이 자신들의 방향이 옳다고 믿고, 자신들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북한이 소련의 꼭두각시이고, 스탈린이 버튼을 눌러 김일성이 (남한을) 공격하게끔 시켰다면, 북한은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붕괴됐을 때 같이 사라졌을 것이다. 다른 말로, 북한의 영속은, 나같은 학자들에게는 북한이 소련의 꼭두각시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민족주의 체제라는 것을 뜻한다. 북한의 영속성에 의해 이는 증명되고 있다. 오는 6월이면 60년이 된다, 60년. 그것(이렇게 분단된 상태가 오래되고 있는 것)이 한국전쟁의 비극이다. 그러나 영속성은 한국전쟁의 기본적인 속성이 내전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은 한국전쟁과는 성격이 다르다. 1954년 베트남 민족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를 무찔렀고, 60년대 미국의 개입 전까지 약 10년간의 공백이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 내전에 미국이 개입한 것으로 보여진다. 소련과 중국은 그렇게 많이 개입하지 않았다. 한국, 중국, 베트남은 식민주의에 저항한 비슷한 경험을 지니고 있다. 이는 민족주의자와 혁명적 저항운동을 만들었다. 그래서 북한은 공산주의 중국, 베트남과 유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 당신의 책에서 나는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처음부터 남북한 분단을 꾀하려 했던 게 아니고, 마치 우발적으로 38선이 그어진 것처럼 이해했다. 38선은 계획된 것인가, 아니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인가? “한국의 분단은 아마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여한 이후 24시간만에 일어난 최악의 결정이었다. 가장 강경한 외교정책가였던 존 맥콜리는 (국무부의) 딘 러스크 등에게 한반도를 나눌 위치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나는 러스크가 나중에 이와 관련한 증언을 하는 것을 들었다. 러스크는 미국이 서울을 차지하기를 원했다. 서울은 프랑스의 파리, 일본의 도쿄처럼 모든 것이 집중된 거대 도시다. 1945년에도 그랬다. 미국 지역에 서울을 포함시킨다는 건 미국으로선 매우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다. 우리는 서울을 원했고, 그래서 38선을 선택했다. 지리학자를 제외하곤 한국인들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그 선이 영원하게 된 것이다. 미국과 소련 양쪽이 38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비록 소련은 어떤 공공문서로도 38선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들은 38선 이남으로 내려가지 않음으로 해서 묵시적으로 38선을 수락했다. 그러나 소련이 한국을 분단하는 것을 직접 저지르진 않은 것이다. 그래서 38선은 미국의 결정이었다. 맥콜리와 러스크는 한국인 어느 누구와도 이를 상의하지 않았고, 동맹국들, 영국, 프랑스, 소련과도 상의하지 않았다. 매우 사려깊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 파급효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한 한국인 작가는 (38선을) 역사의 장애물로 묘사했다. 38선은 동북아시아와 한국사의 거대한 장애물이다. 대부분 미국인들은 이를 모른다. (38선의 획정은) 한-미 관계 비극 중 하나다.” - 미 군정 하에서 하지 중장은 여운형과 중도파 대신 반공주의자이자, 친미주의자인 이승만과 한민당을 택했다. 이는 소련과 북한의 존재 때문인가, 미국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는가? “하지 장군은 매우 흥미로운 존재다. 그는 반공주의자였다. 또 남부 일리노이주 출신이다. 그곳은 40년대 당시 인종차별이 매우 심했던 주였다. 흑인과 백인 학교가 분리돼 있었고, 마치 미국 남부 같았다. 그리고 하지 중장은 매우 보수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다. 하지는 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 그를 환영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비밀정보기구는 국무부 지시를 어기고 비밀리에 워싱턴에서 이승만을 데려왔다. 이승만은 45년 10월 도쿄에 도착해 맥아더를 만났다. 맥아더는 그에게 개인비행기를 제공해 한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하지는 10월20일 성대한 환영식으로 그를 맞았다. 이 모든 게 소련은 물론 국무부 정책에도 반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10월20일 반공적인 연설을 했다. 그리고 당연히 소련은 평양에서 김일성을 내세워 짝을 이뤘다. 분열이 매우 일찍 온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공산주의를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산당을 경험한 적이 없다. 강한 좌익을 가져본 적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인들은 40년대 대일본 저항 과정에서 자연스레 좌익 정체성을 지녔다. 미국인들은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당시) 한국인들은 많은 문제를 좌익이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좌익은 애국적 아우라를 지녔다. 그래서 (당시 미국이 이승만을 택한 것은) 매우 나쁜 결정이었다. 이승만을 데려온 것이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는 단지 상황을 더 양극화시켰을 뿐이다. 2년 뒤 하지는 이승만을 미워했다. 그는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 전에 한국을 떠났다. 그는 이승만이 하와이의 측근들을 데려오는 걸 원치 않았다. 그는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낮았다. 심지어 하지는 부패 혐의로 몇 번이나 이승만을 체포하려 시도한 적도 있었다. 이런 상황은 미국-중국과의 관계에서 조셉 스틸웰 장군과 장개석 사이에서도 있었다. 스틸웰 장군은 장개석, 이승만과 가까웠고, 이들을 지켜봤다. 미국은 잘못된 사람을 택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을 알았다. 이승만은 미국에 35년간 살았고, 반공주의자였다. 이승만은 만일 미국이 이승만을 돕지 않고, 이승만을 한국의 넘버1 지도자로 만들지 않는다면 그밖에 아무도 없다고 믿게할 수 있었다. ‘김구? 아니오. 그와 일할 수 없다. 여운형, 김규식? 아니오. 그들과도 일할 수 없다. 그들은 나처럼 강하지 않다. (오직) 나만이 한국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 이승만은 이런 점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런 상황은) 한국전쟁까지 지속됐다. 53년 이승만에 대항한 쿠데타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전쟁 말기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매우 영리한 정치인이었다. 미국이 그런 사람과 함께 일한 건 실수였다. 그는 상황을 더 양극화시켰기 때문이다. 하지에 대해 하나 더 말하자면, 그는 46~47년에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를 설립하려 애썼다. 그러나 불행히도 너무 늦었다. 이미 양극화된 상태였다. 여운형의 딸이 (북한에서) 내게 말했다. 장택상이 47년 7월에 여운형을 암살했다고. 장택상은 당시 수도경찰청장이었다. 나는 이게 진실인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미군정이 장택상을 용의자로 의심했다는 건 사실이다. 46~47년의 이런 일들이 (좌우) 상황을 더 양극화시켰다. 하지는 45년 9월에 여운형, 김구, 김규식과 논의를 했어야 했다. 이승만이 아니라.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을 선택하는) 매우 나쁜 결정을 했다.” - 이승만은 한국전쟁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우파들 사이에선 건국의 아버지로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있다. “모든 나라가 건국자에겐 관대하다. 조지 워싱턴을 비판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나는 역사학자는 문서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다뤄야 한다고 본다. 비록 미국이 45~60년에 이승만을 지지했고, 그가 잘 하기를 원했지만, 미 정부 안에선 이승만의 부패, 측근들의 권력남용에 대한 서류가 가득찼다. 이승만은 김석원과 백인엽의 형 백상엽 등을 취임시켰다. 북한에도 일본에 종사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수는) 적었다. 49~50년에 이승만은 (남한이) 북한을 침공하는데 미국이 지지하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 이건 레토릭한 선전이 아니다. 모두 문서에 있는 것들이다. 저널리스트인 윌리엄 매튜스의 기록을 보면, 심지어 전쟁 1주일 전에 존 포스터 덜레스가 한국에 왔다. 덜레스는 이승만을 만났다. 덜레스는 트루만 행정부의 대사였다. 이승만은 말했다. ‘우리는 북한을 공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우리를 도울 필요가 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역사학자는 영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영예롭게 하는 일을 못한다. 이승만은 미국의 지지가 없었다면 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해방 직후) 그에 대해 들은 적도 없었다. 그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이미 70살이었고, 35년동안 나라 밖에 있었다. 그는 미국 출신의 첫번째 박사였다. 어떤 측면에선 매우 똑똑한 정치지도자였다. 그는 한국의 파벌을 다룰 줄 알았고, 특히 미국을 다룰 줄 알았다. 그러나 보수적 역사학자들은 이승만의 진짜 행동을 보여주는 문서들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이승만은 김일성만큼 전쟁을 유발시켰다. 김일성은 결국 소련과 중국의 지지를 얻어냈고, 미국은 거절했다. 이게 근본적인 차이다.” - 당신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 일부 비평가들은 이 책이 수정주의 사관에 입각해 너무 주관적이라는 비판을 한다. 어떤 비평가들은 김일성이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소련에 이를 간청했다는 옛소련 외교문서를 근거로 ‘김일성이 소련의 승인없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당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거의 20년동안 비판받아 왔다. 그러나 내 첫번째 책은 문서들을 통해 (이전의 생각을) 수정하기 위해 나왔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묻는 것은 ‘어떻게 너의 논문이 이전(의 논문들)과 다르게 만들 것이냐’는 것이다. 둘째, 조심성있게 말하자면, 내 책은 미국에서 이런 종류의 책이 얻을 수있는 최고의 상인 미국 역사학회가 수여하는 존 킹 페어북 상을 받았다. 한국에서 (내 책을) 이해하는데는 마이너한 문제와 큰 문제가 각각 하나씩 있다. 첫번째 (한국) 번역물은 터무니없었다. 내가 3~4페이지도 읽을 수 없을다. 그들(번역자)은 내가 쓴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많은 은유(메타포)를 사용했다. 그리고 다소 문학적으로 쓰려했다. 그런데 이런 것들 대부분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했다. 그 번역본은 아직도 소위 해적판이라고 하는 형태로 불법유통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내가 첫번째 책에서 말한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번역을 통해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마이너한 문제다. 중요한 문제는 기록문서와 관련된 것이다. 90년에 두번째 판이 출간된 뒤, 소련이 해체됐다. 내가 알 수 없었던 것을 소련의 문서에는 있었을 것이다. 소련 문서들에 있는 것을 모른다고 나를 비판하는 것은 내가 미 군정기에 있는 문서들을 모른다고 한국역사학자들을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은 (미국 문서에) 접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소련 문서)에 접근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소련) 문서들이 공개되는대로 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을 침공한 첫번째 주동자는 스탈린이 아닌, 김일성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김일성은 지속적으로 스탈린에게 지원을 간청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에게 제한된 지원을 허락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면적 침략을 감행했다. 나의 가장 심한 비평가들, 캐서린 위더스비와 같은 사람도 지금은 (나의 견해를) 인정한다. 캐서린은 늘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건 스탈린의 전쟁이다. 스탈린이 단추를 눌렀다’라고. 나는 그런 주장에 내 귀를 닫았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일 리가 없기에. 그리고 지금 판명됐다. 게릴라 전쟁이 아닌, 국지전이 아닌, 전면적 전쟁을 치르기로 한 결정은 김일성이 내린 것이다. 김일성의 목표 중 하나는 남한을 점령해서 김석원과 같은 사람을 붙잡아 그들의 목을 비틀고 그들이 30년대에 저지른 것을 추궁하려 했다는 것이다. 김석원이 김일성의 첫번째 아내 김혜순을 살해했다는 루머가 있다. 나는 김혜순이 그의 첫번째 아내인지, 그리고 이게 사실인지 모른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석원 사이에 누군가의 죽음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한국전쟁에 대한) 주장이 옳았다고 본다. 김대중은 ‘김일성이 50년대에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먼저 한국, 그 다음 일본 식의 세계 공산화 전략을 추구한 게 아니었다.” - 남북한 중 한국전쟁의 영향은 지금까지 어느 쪽이 더 심하게 받고 있느냐? “북한이 더 심하게 영향받고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북한은 (전쟁 이후) 100만명 이상의 군을 지닌 요새 국가로 바뀌었다. 모든 국민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지하시설물을 설치했고, 부족한 자본의 상당 부분을 군비로 쓴다. 북한은 전쟁을 위해 재조직되고 있다. 원인은 미국이 한국전쟁을 끝내려는 외교적 노력(종전협정 또는 평화협정 체결 등)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녔다.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전쟁의 효과는 정말로 북한을 군사정부로 변형시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남한의 경우, 65년 이래 경제발전이 됐다. 이는 남한을 계속 변모시켰다.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한국전쟁에 대해 생각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인터넷에 몰두하고, 하이테크 산업의 일자리를 찾는다. 남한은 한국전쟁 이래로 (북한보다) 더 정상적이고 더 예측가능한 종류의 발전을 해왔다. 물론 만일 한국이 45년에 통일됐다면 한국은 더 오래 전에 안정된 상태를 찾았을 것이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깊게 영향받고 있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이 만든 (남한의) 군부가 61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80년에는 전두환의 쿠데타가 있었다. 군부는 30년동안 한국정치의 주요한 인자였다. 그러나 남한은 민주화됐다. 나를 공격했던 사람들, 우익과 반공주의자들이 (이제 남한에서) 영향력이 줄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젊은 사람들은 30년전에 교과서에서 읽은 것보다 내 책을 더 믿는다. 만일 85년이라면, 나는 남한이 아직도 한국전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두환과 군부가 군부독재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를 바꿨다. 원더풀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종류의 변화는 북한에도 일어날 수 있다. 어떤 형택라 될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 국제법 측면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정전 상태일 뿐 종전이 아니다. 총성이 멎은지 60년이 됐는데도 종전에 이르지 못하는 까닭이 뭐라고 보나? 이런 현실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누가 어떤 책임이 있다고 보나? 남과 북이 정전체제를 뒤로 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나? “적법성은 한국전쟁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해리 트루만은 미국 헌법을 따르지 않았다. 미 헌법은 전쟁을 선언할 때 의회의 비준을 받을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의회 대신 유엔으로 갔다. 그리고 전쟁선언 없이 지구 건너편으로 50만명의 미군을 보낸 첫번째 대통령이다. 린든 존슨 대통령도 베트남전에서 그렇게 했다. 조지 H.W.부시, 조지 부시도 이라크전에서 그렇게 했다. 4번의 주요한 전쟁에서 미국은 전쟁선언없이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 헌법에 따르면, 모두 불법이다. 53년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아이오와주 법원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하하) 그건 경찰 출동이었으니까, 전쟁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합법성이란 한국전쟁에선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김영삼과 빌 클린턴이 4자회담(남북한, 미국, 중국)을 했을 때인 90년대에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지금보다) 더 쉬웠을 거라 생각한다. 북한은 평화조약(treaty)의 요구를 포기했다. 미국 헌법에서 조약은 상원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아마 상원이 이를 거절하리란 걸 알았다. 그래서 북한은 평화협정(agreement)으로 바꿨다. 불행히도 이마저도 이뤄지지 않았다. 평화협정이 한국전쟁을 법적·기술적 관점에서 끝낼 것이다. 그러나 평화협정이 남북한 사이의 대치까진 끝내지 못할 것이다. 한국전쟁을 끝내려는, 남북한 대치를 끝내는 가장 큰 노력은 김대중이 취임했던 98년 2월부터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지난 10년간이었다. 남북관계 진전의 가장 큰 성취가 이들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90년대 후반 미국이 이런 (한국에서의) ‘진전’과 나란히 가지 않았다. 그 결과 2001년 이래로 (남북관계에서) 거의 진전이 없었다. 그리고 북한은 지금 핵보유국이라고 주장한다. 90년대 후반의 (남북관계) 진전이 지난 10년간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건 매우 불행한 일이다.
덩샤오핑도 “북 개방 필요”…DJ·정주영 통일방식 옳아 <통일> - 통일에 대해 얘기해보자. 통일은 필요한가? 어떤 이들은 통일이 경제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게 될 것으로 본다. ‘그런 비용을 치르고도 왜 통일을 해야하나’라는 의문을 표시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배우는 건 관성의 법칙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화요일 한 것을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에도 한다. 더 쉽고 더 예측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통일이 꼭 해야하는 필연은 아니다. (그러나) 60년 동안 미뤄왔던 이상 또는 꿈과 같은 것이다. 한국이 재통일 될 것이라는 걸 믿는다. 비록 60년간 (양쪽이) 매일 다른 선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은 매우 비슷하고, 양쪽 모두 한국의 동질성을 믿는다. 그래서 언젠가 통일은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어느 누구도 한국의 통일을 위해 큰 희생을 하려하지 않는다. 관성이란 그런 점에서 비난받아야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이 ‘만일 어떤 사람들이 내일 아침 중국에서 400만명의 사람들이 기아, 홍수로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매우 평화롭게 잠자리에 들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아침에 내 작은 손가락 끝이 갈라졌다면, 나는 밤새 잠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이란 다 그런거다. 서울에서 삼성같은 멋진 일자리를 갖고 있다면, 왜 북한의 통일을 위해 (자신의 것을) 희생하길 원하겠느냐? 또 북한에서도 김정일과 그 가족들이 60년동안 통치해다. 거의 70년간. 그들이 왜 남한과의 통일을 위해 자신들의 권력을 포기하겠는가? 나는 아직도 김대중과 노무현 10년이 통일을 위한 큰 진전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기본은 화해였다. 즉각적인 통일이 아니라. 만일 남북한 사이에 화해가 없다면 통일로 조금도 나아갈 수 없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 적으로 보기보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친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건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진실과화해위원회’가 한국전쟁을 조사했는데,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문서에 기반한 역사의 재건, 진상규명, 그리고 희생자들과 가해자들에 대한 이해 등이 통일을 위한 배경이 된다. 최근 ‘진실과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를 보면, 전쟁기간 동안 남한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 50년 6월부터 51년 중반까지 전쟁 첫해에 일어났고, 남한 당국이 6~7건에 관여돼 있다. 또 공산주의자들과 좌익의 학살행위도 한 번 있다. 6 대 1의 비율이다. (진상규명은)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역사의 위치를 부여한다. 또 (가해자와 희생자) 양쪽 모두 서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진실과화해위원회’의 문을 닫지 말길 바란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문을 닫을 것처럼) 보인다.” 김대중·노무현 10년동안 통일 큰 진전
MB ‘진실·화해위’ 문닫지 말아야 - 한국인들에게는 미국이 한국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오랜 신화가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미국과 같은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이 통일을 원치 않는다고, 오래 전에 그렇게 생각했다. 현상유지를 위해 통일을 희생시킬 것이라는 의구심이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의 화해 정책은 미군의 주둔을 전제로 하고 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대중은 ‘미군이 통일 이후에도 (한반도에) 머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김정일의 동의를 얻었다. 이는 (김대중 통일정책의) 기본적인 설계다. 한국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고 보호하는 논리적인 계획이다. 그리고 빌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의 현실정치 측면에서 한국의 통일을 지지했다. 21세기에 미국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무엇이냐? 중국이다. 국방성은 소련 붕괴 이후부터 중국에 대해 걱정해왔다. 중국은 동아시아의 (최대) 권력이기에 미국의 이해관계에 실질적 위협이 된다. 한국은 다르다. 우린 동맹이다. 미국은 한국의 통일을 도울 수 있다. 북한 또는 북한의 리더십을 중립화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김대중이 늘 이상주의, 몽상가라는 지적을 받았는데, 사실 그는 매우 친미적이었다. 김대중은 한국에서 미국이 개입된 상태에서의 남북한 화해·통일을 원했다. 일본은 한국의 통일을 꺼려할 지도 모른다. 통일한국은 일본의 더 강한 경쟁자가 되기 때문이다. 중국은 북한이 권력을 유지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북한과 중국은 마지막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한반도 통일에 별 영향이 없다. 미국은 클린턴과 김대중의 등장 이후, (통일이 되더라도) 동북아시아에서 안정된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 - 한국이 통일의 좋은 보기를 가졌느냐? 베트남과 독일은 각기 다른 통일 과정을 거쳤다. 한국이 그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나? “베트남의 통일방식은 1950년 김일성의 방식과 같다. 베트남 통일은 전면적인 침략으로 끝났다. 베트남은 남부 베트남 권력을 부쉈다. 그건 오늘날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보기가 아니다. 독일은 늘 한국에서 통일의 본보기로 제시됐다. 그러나 그건 좋은 보기가 아니다. 동독은 소련의 꼭두각시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동독은 10만명의 경찰력 같은 작은 군대만 지녔다. 소련은 동독에 36만명의 주둔군을 지녔다. 이것이 독일과 한국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모스크바에서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고르바쵸프가 동독에 군대를 이동시키지 않는 그런 조처만으로, 한국이 통일을 얻을 순 없었다. 또 독일 통일은 매우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독일 시민의 세금을 많이 올렸다. 한국인들이 이를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김대중과 정주영이 추진했던, 남포와 개성 등 북한 수출자유지역 정책은 조금씩조금씩 북한을 재건할 수 있었다. 북한의 임금이 낮기 때문에 남쪽 기업이 이득을 얻을 때, 북한의 인프라구조도 조금씩 발전한다. 경제적으로 수십년에 걸쳐 남북한을 재통합하는 건 매우 좋은 계획이었다. 2006년 김정일과 노무현의 정상회담에서 황해도 해주와 남포항과 관련된 협정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이행되지 않았다. 이런 방식이 훨씬 낫다. 독일의 통일은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다시 말하자면, 김대중과 노무현, 클린턴 정부에서의 대북 정책이 좋았다. 그러나 조지 부시가 들어온 이후, 노무현이 물러난 이후, (모든 게) 작동되지 않고 있다. 남북한 양쪽 모두에서.” - 당신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대북 정책을 더 좋아하죠? “당연하다. 나는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선출됐을 때, 꽤 놀랐다. 나는 오랫동안 그를 알았다. 나는 그가 대통령이 못될 줄 알았다. 그런데 선출됐다. 내 판단이 틀려 매우 기뻤다. 98년 2월 취임식에 참석해 취임 연설을 들었다. 그는 근본적인 방식의 대북 정책을 실시하리란 걸 알았다. 그런 근본적인 변화가 옳다. 그가 많은 진전을 이뤄냈다든 것을 역사가 증명해준다. 개성공단에는 4만명의 노동자가 있다. 앞으로 10만명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20년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건 정주영과 김대중의 리더십이 이룬 주요한 성취다. 사람들은 ‘북한에 돈을 퍼붓는다.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남북정상회담을 (돈으로) 샀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는 건 쉽다. 우리는 한 발 뒤로 물러나 객관적으로 역사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남북관계에서) 김대중이 많은 진전을 이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명박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이뤄진 남북간 협정을 많이 무시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심각한 물리적 충돌이나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명박은 북한을 거칠게 대하겠다고 공약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 그의 정치적 지지층은 보수적이고 한국 정치스펙트럼에서 오른쪽에 위치한 이들이다. 그는 그의 정책이 아니라, 경제가 나빴기 때문에 당선됐다. 그 선거 결과에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건 그가 작동되지 않는 정책을 꾸준히 고집한다는 점이다. 북한과의 관계는 더 나빠졌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이후, 적어도 지난 6개월간, 북한은 미국과 남한에 좀더 온건해지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이래로 남북관계에서 진전이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 이건 당파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북한을 압박하는 강경책으로, 북한이 자신들의 행동을 바꾼다고 생각해보자. 매우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2006년에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그리고 지난 5월에 또 핵실험을 했다. 1945년 이래로 북한은 압박이 들어오면 곧추선채 저항해왔다. 그들의 대처 방식이다. 카터 행정부 당시 등소평은 중국을 통치했다. 등소평은 당시 지미 카터에게 말했다. ‘북한을 압박해서는 절대 이기지 못한다. 북한을 조금씩 고립에서 빠져나오게 할 필요가 있다’고. 옳은 말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클린턴 행정부와 함께 지난 10년간 튜브에서 치약을 나오게 하려고 쥐어짰는데, 이명박이 다시 치약을 튜브 뒤쪽으로 밀어넣었다. 한국은 ‘진실과화해위원회’가 애쓰는 한국전쟁 대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모두 다 잊어버리자’라고 말할 순 없다. 이명박은 경제적 관점에선 좋은 대통령일 순 있다. 한국 경제는 안정되고 있다. 이명박이 한 것 중 좋은 것들도 많다. 그러나 (그의) 대북 정책은 작동되지 않고 있다.” 이란과 달리 미국과 관계개선 희망
북한, 핵무기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 - 이명박은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북한의 ‘선 핵폐기’를 요구한다. 이게 효과적이라고 보나? 아니면 그의 접근이 조만간 바뀔 것으로 보나? “답변이 좀 길 것 같다. 미국에서 외교정책 결정은 매우 당파적인 이슈다. 빌 클린턴이 떠나고 조지 부시가 취임했을 때, 클린턴의 정책 대부분을 뒤엎었다. 이건 북한과 클린턴 사이에 맺은 협정도 무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북한의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2000년 10월 백악관에 와 ‘북한과 미국이 서로 적대하지 않는다’는 협정에 사인했다. 그런데 부시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묘사했다. 그는 북한을 우선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북한은 이에 ‘협정의 잉크도 마르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이명박도 김대중-노무현 당시 남북 정상회담에서 맺어진 주요 협정, ‘서로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협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한국에서도 당파적인 변화가 있었다. 외교정책에는 영속성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상대방은 이쪽의 내부 정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 북한은 배반당했다고 느꼈다. ‘만일 미국이나 한국의 다음 대통령이 이전에 맺은 협정을 파기한다면, 우리는 왜 약속을 지켜야 하느냐’라고 북한이 말한다. 북한은 이런 문제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지도자는 영원히 똑같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 체제이기 때문이다. 조지 부시와 이명박이 전임자들이 맺은 협정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좋은 게 아니다. 불행이다. 또 내가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김대중이 2001년 3월 (미국을) 방문한 이래로 한-미간에 정책 불일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일도 있었다. 한쪽이 이쪽으로 갈 때, 다른 한쪽은 정반대로 갔다. 김대중은 (부시 정부에서도) 햇볕정책이 유지되길 바랐다. 그러나 조지 부시는 김대중에게 ‘너는 북한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시엔엔>(CNN) 평양 특파원이었던 마이클 치노이가 펴낸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김대중이 워싱턴을 방문하기 전에 부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였다. 김대중이 전화를 걸었을 때, 부시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전화를 받았지만, 수화기를 손으로 덮고 비서에게 ‘이 사람 누구야?’라고 물었다. 김대중은 몇 달 전에 노벨상을 받았는데 말이다. (이처럼) 부시는 외교문제에 문외한이었다. 그리고 김대중은 세계에서 가장 경험많은 정치인이었다.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을 감행했다. 한국전쟁 동안 해리 트루만 대통령은 매우 인기가 없었다. 한국인들은 이를 잘 모를지도 모른다. 52~53년 트루만은 여론조사가 취해진 이래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없는 대통령이었다. 당시 미국인들은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2007년 부시의 인기는 트루만과 비슷했고, 2008년에는 그보다 더 낮았다. 그리고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없는 대통령으로 백악관을 떠났다. 이명박은 취임하면서 부시와 친해지려 했다. 그는 부시를 강하게 붙잡았다. 또 노무현과 부시 사이에 벌어졌던 한미관계의 어려움을 복구하길 원했다. 마치 그것이 노무현의 잘못인 것처럼. 그러나 그건(한미관계가 어려웠던 건) 부시 잘못이 더 컸다. 이명박은 부시를 껴안았다. 그러나 부시는 이미 레임덕이었다. 인기 없이 백악관을 떠났다. 우린 선거에서 정권이 바뀔 것이란 걸 알았다. 이명박이 보기에 (부시의 정책을 따르는게) 현명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보수 인사가 또다른 보수 인사를 좋아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부시가 ‘북한과의 대화’라는 김대중의 정책으로 돌아설 때, 이명박이 부시를 끌어안았다. 부시는 이쪽 방향으로 가고, 이명박은 북한을 향한 강경이라는 또다른 방향으로 갔다. 이명박이 서울에서 대북 강경 자세를 유지할 때, 버락 오바마도 북한에 대해 대화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국과 미국의 대북 정책이 어긋난 게 2001년 이후 10년이다. 북한이 뭘 생각하는지, 북한이 얼마나 나쁘든지간에, 이런 정책 혼란의 책임이 북한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북한은 실제로 미국과 남한의 대북 정책을 알길 원햇다. (대북 정책 혼란은) 미국과 남한의 내부 정치 때문이다. 궁금한 건 이명박은 북한에 대해 화해정책을 펼 줄 알았다. 왜냐하면 정주영은 매우 능동적이었고, 경제개발을 밀어붙였고, 이명박은 현대 최고경영자 출신이니까. 그래서 나는 그가 매우 실용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북 경제정책에선 그러지 않았다. 미스테리다.” - 이명박은 현대가 북한에 투자하기 전에 현대를 떠났다. “맞다. 그렇다” - 오바마의 대북 정책도 부시의 대북 정책과 별 차이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건 북한의 실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했을 당시, 북한은 미국을 향해 도발을 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북한에 손을 뻗었을 것이다. 미국은 쿠바, 리비아, 이란 등에 손을 뻗었다. 북한은 소위 불량국가로 불리는, 냉전 상태로 놓여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다. 북한은 (오바마 행정부에) 엄청난 요구더미를 내던졌다. ‘우리는 핵보유 국가다. 미국은 이걸 알아야 한다. 우리는 10년전부터 경수로를 원했다. 우리에게 경수로 두 개를 달라. (그 대가로) 우리에게 무얼 하라고 말하지 마라’ 등등등. 그들은 2009년 초에 최대의 요구를 계속했다. 그들은 4월에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 독립기념일에는 더 큰 실험을 했다. 이는 명백하게 (북한이) 미국과 친밀하려는 의도였고, 미국의 주의를 얻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거꾸로 아무 효과가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으로 하여금 가장 강경한 대북정책 라인이었던 존 볼튼 전 주유엔 대사의 정책을 취하게 만들었다. 북한의 행동 때문에. 오바마가 부시의 대북정책을 지속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어리석은 북한의 도발이지, 오바마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해야할 행동의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미국 기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지난 여름 방북한 것이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왜냐하면 클린턴과 김정일 사이에 매우 실질적인 대화가 있었다. 클린턴은 10년 전 북한에 대해 새로운 미국의 정책을 추진하고 양국간 협정을 만들었던 이다. 클린턴 방북 이후, (북한이) 다른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북한은 5월 핵실험 이후, 지난 몇 달간 도발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10년 전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고 다소 희망적으로 생각한다. (오바마) 행정부 안에는 부시 행정부와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이 다 있다. 오바마 행정부 안에서 대북 정책 방향성을 놓고 이들 사이에 큰 다툼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세력은 북미 관계가 10년 전 협정으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다.” - 6자회담이 북핵 문제 해결의 틀거리로 적절하다고 보나? “6자회담은 중국이 주창했다. 또 늘 중국이 주최했다. 중국에게 (6자회담은) 매우 중요하다. 중국은 북한과 미국이 서로 대화할 수 있도록 하려 했다. 그런데 조지 부시는 ‘북한과 대화하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딕 체니는 ‘나는 대화하지 않겠다. 우리는 악과는 얘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북한은 (부시 정부에선) 악의 축이었다. 그래서 미국과 북한이 서로 대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게 6자회담의 주요한 목적이었다. 북한이 6자회담으로 복귀하는 건 전적으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6자회담은 성공적이었다. 심지어 조지 부시도 (북미간) 협정으로 움직이게끔 했다. 또 중국은 북한의 주요한 동맹이다. 중국은 북한이 6자회담으로 돌아오지 않아 중국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북-미 대화 다음에 6자회담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연구>
브루스 커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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