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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18 18:18 수정 : 2018.01.18 20:26

조기원
도쿄 특파원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전라북도 전주에 살던 당시 열아홉살 주석봉씨는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야하타제철소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자신이 징용을 안 가면 배급이 끊겨 식구들이 굶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징용을 피할 길은 없었다.

야하타제철소에서는 삽으로 탄을 옮기는 단순 막일을 했다. 배급량이 적어서 항상 배가 고팠다. ‘징용’ 글자가 새겨진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멀리 도망갈 수도 없었고, 도망치다 잡히면 거의 죽을 정도로 맞았다. 월급은 고향으로 송금한다며 주지 않았다. 주씨는 20살이 되던 해 야하타제철소를 떠났다. 징병 영장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징용과 징병으로 두번 동원됐다.

주씨의 이야기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함께 만든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일본의 메이지 산업유산과 강제노동>에 실려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는 이 가이드북을 한국어, 일본어, 영어 3가지 언어로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

주씨가 동원됐던 야하타제철소는 일본 중공업 발전을 이끈 대표적 제철소로, 전후 후지제철과 합병되어 신일본제철이 되었다. 포항제철 설립 때 기술 지원을 한 곳이 신일본제철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청나라에서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낸 뒤, 청에서 받은 배상금 80%를 군비 확장에 썼고 20%는 야하타제철소 건설과 철도, 전신·전화 사업에 투자했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은 야하타제철소에서 생산한 철강으로 군함과 어뢰, 전투기를 만들었다. 일본이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록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중 일부인 야하타제철소의 역사를 조금만 들춰보면, 이 시설을 ‘산업혁명의 빛나는 성과’로만 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올해 메이지유신 150주년 축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지난 4일 미에현에 있는 이세신궁에서 연 새해 기자회견에서 올해가 메이지유신 150주년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세신궁은 일본 왕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모신 신사다.

아베 총리는 “150년 전 아시아에 식민지 지배 위기가 닥쳤다. 나의 고향인 조슈(현재의 야마구치현)에서는 쇼카손주쿠(메이지유신 시기 사상가인 요시다 쇼인이 강의를 했던 사설 교육기관)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젊은이들이 모였다”며 “선조들은 힘을 모아서 국난으로 부를 만한 위기를 극복하고 독립을 지켜냈다”고 말했다. 쇼카손주쿠에 모였던 젊은이 중 한명인 “이토 히로부미는 원래 농민 출신이었다”고도 말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근대화를 이뤘으며,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일본이 등록한 야하타제철소도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이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 야하타제철소, 미이케 탄광, 하시마(군함도)탄광 등에는 조선에서 동원된 노동자들의 한숨과 눈물이 배어 있다. 일본 정부는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유네스코 등록 당시 조선인 노동에 대해서 설명한다고 했지만, 최근 행보를 보면 회의적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말 ‘군함도’ 조선인 강제노동에 대한 설명 자료를 현지에서 1200㎞ 떨어진 수도 도쿄에 설치한다는 계획서를 유네스코에 냈다.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승리와 성과의 역사로만 기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신청한 제철소와 탄광에는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뿐만 아니라 가난한 일본인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싶다.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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