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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1.05 19:18 수정 : 2012.01.06 13:00

정남구 도쿄 특파원

사람들은 5년 만에 또,
구세주 왕을 찾고 있다

1994년 3월12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강원도 업무보고를 받은 뒤 춘천 동산면의 한우 개량단지를 방문해 사람들과 점심을 먹었다. 그날 노인회장은 이렇게 환영의 인사말을 했다.

“우리 마을이 생긴 이래, 나라의 임금님이 오신 것은 처음입니다. 역사에 남을 일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나는 임금이 아니고 대통령”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한바탕 웃게 했다고 한다.

그날 노인회장의 말을 내가 아직 기억하는 것은 그의 말이 참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명칭은 ‘대통령’이지만, 실은 ‘왕’을 선거로 뽑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 뒤 스무해 가까이가 지났지만 내가 보기엔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우리는 ‘뽑은 왕’에게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준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은 ‘왕’이 단순한 절대권력자에 머물지 않고 ‘구세주’여야 한다는 점이다.

최근 우리나라를 이끈 두 대통령은 특히나 그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 이후 심각해진 빈곤화·양극화의 흐름을 저지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나라 경제의 취약해진 성장력을 확 끌어올려 문제를 해결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모두 크게 실패했다. 사실상 노무현당이라 할 수 있는 열린우리당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빨리 추락한’ 기록을 남겼다.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시작 이후 추락이 가장 빨리 시작됐다는 점에서 기록을 세웠다. 슬픈 것은 그들의 실패가 아니다.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가 엄청난 에너지를 투입해 해결을 추진해왔음에도, 국민이 간절하게 해결을 바라던 문제들은 오히려 악화되기만 했다는 점이다. 나라의 성장력은 갈수록 약해지고, 보통사람의 살림살이는 피폐해졌다.

왜 그랬을까? 나는 우리가 ‘구세주 왕’을 뽑는 데도 상당 부분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새로운 나라를 향한 기대와 열망이 넘친 나머지, 기존 정치집단 바깥에 꼭꼭 숨어 있던 새 영웅을 찾아 불러내려 한다. 그는 어차피 왕이므로, 그가 사람을 잘 골라 쓰면 다른 문제들은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큰 착각이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서야, 우리가 뽑은 왕이 하늘이 내린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곤 한다. 우리는 사극에서처럼 우리의 왕이 사악한 신하들을 물리치고 백성을 위해 뭔가를 해내길 바라지만, 실제 우리가 하는 일은 5년마다 왕을 (정치적으로) 죽이고 새로 뽑는 일이다.

현대 사회의 복잡한 정치과정을 고려하면 아무리 타고난 정치지도자라 해도 정책을 정교화하고 실현할 의지와 능력을 가진 정당이나 그에 준하는 정치조직의 지원 없이 비전을 성공적으로 실현하기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국민이 왕을 뽑는 나라에서 왕이 되려는 사람은 때묻은 정당을 오히려 짐으로 여긴다. 정당은 나라를 책임질 능력을 기르고 국민에게 이를 호소하기보다는 우리편 왕을 만들어낼 꼼수 개발에 더 매달린다. 그래야 권력에 발을 걸칠 수 있는 까닭이다.

20년 만에 총선거와 대통령선거가 같은 해에 치러지는 역사적인 해가 열렸다. 흐름을 보면 5년 전, 10년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또 한번, 구세주 왕을 찾고 있다. 이런 정치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뀌기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실패의 크기를 줄이려면 정당들이 앞에 나서야 한다. 후보에게 정당이 선택받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먼저 자기 개혁의 경쟁을 벌이고 후보를 고를 수 있게 준비해야 한다. 선거가 책임과 능력을 갖춘 정당들의 정책 대결의 장이고, 그 과정에서 정책 수렴이 일어날 때 그 사회는 그만큼 성숙한다.


정남구 도쿄 특파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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