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8.04 19:15
수정 : 2011.11.2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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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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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회문제들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중국인들의 분노와 상처가 깊은 이유다
낡은 열차가 신음처럼 연기를 토해내며 플랫폼에 들어섰다. 숨막히는 무더위 속에 2시간째 연착하는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지친 표정으로 기차를 향해 몰려들었다.
중국에서도 가장 빈곤한 서남부 구이저우성의 시골역, 소수민족 주민들이 등에 멘 대바구니에는 짐이 잔뜩 담겨 있다. 수십년은 된 듯한 낡은 완행열차는 베이징·상하이 등 부유한 동부지역을 달리는 최첨단 고속열차와는 먼 세상을 보여주는 중국의 또다른 얼굴이다.
열차 안, 승무원과 시비가 붙은 한 남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며칠 전 일어난 원저우 고속철 사건 이야기를 꺼내며 “일본 신칸센은 수십년 동안 사고가 한번도 안 나는데 왜 중국 고속철은 사고투성이냐”며 “철도부가 인민을 무시하고 엉망으로 일을 하기 때문 아니냐”고 따졌다. 승무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7월23일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 저장성 원저우에서 고속열차가 다리 아래로 추락해 40명이 숨지고 190명 이상이 다친 사건은 중국인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박혔다. 엉망으로 부서진 흰 고속철 열차의 동체에는 ‘허셰호’라는 검은 글씨가 선명했다. 조화를 의미하는 ‘허셰’(和諧)는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통치 이념이다. 추락한 허셰호는 이번 사고가 고속철만의 문제가 아닌, 중국 모델 전체의 위기라고 절규하는 듯 보였다.
‘철도 왕국’으로 불리는 중국 철도부는 210만명의 직원에, 자체적인 사법·경찰 조직과 세계 최대 규모의 건설회사들을 산하에 거느린 공룡 조직이다. 철도부가 추진해온 고속철 사업은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융위기를 극복했다고 자랑하게 만든 비법이었다. 경기부양 자금 4조위안 중 상당 부분이 고속철 사업에 투입됐고, 철도부는 정부 통제를 받는 은행들로부터 천문학적인 돈을 빌려 투자에 나섰다. 철강·시멘트 산업 등을 장악한 국유기업들은 이런 대규모 공사를 통해 과잉생산 문제를 은폐하고 거대한 이익을 독점했다. 공사 수주 과정에선 대규모 뇌물이 오갔다.
구이저우처럼 낙후된 지역의 가난한 농민들이 타는 열차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상하이·항저우 등 부유한 지역에는 몇년 만에 시속 100㎞, 200㎞, 300㎞짜리 철도가 나란히 들어섰다. 그 사이 철도부의 부채는 2조위안을 넘어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5%로 부풀었다.
중국 철도부와 고속철은 성장률과 속도에 집착하는 경제, 부정부패, 권위주의, 빈부격차, 하드웨어 확장에 집착하지만 삶의 질을 돌볼 여유가 없는 성장 등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의 종합세트였다. 이번 사고로 그런 문제들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중국인들의 분노와 상처가 깊은 이유다.
사고 뒤 일주일 동안 관영 언론들까지 철도부 비판의 ‘백화제방’에 동참했다. <인민일보>는 1면에 “중국은 발전을 원하지만, 피로 물든 국내총생산(GDP)은 필요치 않다”는 기사를 실었다.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의 앵커 추치밍은 “‘중국, 제발 속도를 낮춰, 너무 빨리 가지 마, 사람들의 영혼을 남겨두고 가지 마’라고 말하고 싶다”는 말로 뉴스를 마무리했다. 권력의 지나친 독점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며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금지선’을 위협하며 끓어오르는 비판을 억누르려고 중국 공산당이 보도통제지침을 내린 다음날, <경제관찰보>는 마지막 생존자로 구조된 2살 난 아이에게 보내는 글을 1면에 실었다. “이이, 네가 자라면 7월23일의 어두운 밤이 변화의 시작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날 이후 우리는 불평만 하지 않고 어떻게 권리를 지키고 행동해야 하는지 배우게 됐다.”
중국인들의 절실한 깨달음이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키게 될까?
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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