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7.28 19:12
수정 : 2011.07.2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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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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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회담이 잘되면 천안함·연평도 입장을
또 바꿔야 되는 상황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26일(현지시각) 오후 미국 뉴욕 존에프케네디 공항에서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득달같이 달려드는 기자 100여명의 질문공세를 피하지 않았다. 북새통 현장 뒤, 녹음기를 풀어보니 “6자회담 등 관심사 논의”, “6자회담 통해 비핵화로 전진”, “6자회담 (재개) 낙관” 등 유난히 ‘6자회담’을 강조했다.
미국도, 북한도 이번 북-미 회담이 6자회담으로 이어지리라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조지 부시 행정부 당시인 2008년 12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마지막 6자회담’은 파행으로 끝났다. 북한의 비핵화 조처에 ‘시료채취가 포함된다’고 유권해석한 크리스토퍼 힐 미국 6자회담 대표를 향해 김계관 북한 대표가 다른 대표들 앞에서 “거짓말쟁이”라고 공개비난하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힐은 “미국에서 급한 약속이 있어 먼저 가야 한다”며 일어나려 했다. 부랴부랴 내용 없는 성명을 만들어 발표하고선 끝냈다.
그리고 2년7개월.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에 천안함·연평도 사태까지 터졌다. 6자회담 환경은 극도로 악화됐다. 그런데도 김 부상이 ‘6자회담’을 강조한 이유는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는 대외홍보용으로 해석된다. 북-미 회담에서 북한이 얻으려는 바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안전보장, 경제지원 등이고, 시급한 과제는 식량이다. 또 북-미 회담을 지렛대로 과도한 중국 의존도를 개선하고픈 마음도 강할 것이다. 내년 강성대국 원년을 앞두고 대외적으로 뭔가 보여줘야 하는 대내 정치적 목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6자회담에 나가 다른 5개국으로부터 핵 포기를 압박받는 상황은 원치 않을 것이다.
미국의 심사도 복잡하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이후 단 한번도 6자회담이 열리지 않았다. 한반도 상황이 더 악화될 가능성에 대비해 “우리도 애썼다”는 최소한의 ‘알리바이’는 구성해야 한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추가 도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위기관리를 할 필요도 높다. 그러나 미국 역시 공전만 거듭할 6자회담으로 지금 가고픈 생각은 없어 보인다.
한국 입장은 뭔가? 이번 북-미 회담을 바라보는 이명박 정부의 표정은 불편해 보인다. 마치 점찍듯 시늉만 낸 듯한 발리 남북대화가 끝나자마자, 북-미 회담이 열린다.
북-미 회담에 대해 한국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모른다”, “우리와는 상관없다”며 애써 관심 없는 체한다. 성의가 있는 사람들은 “제비 한 마리 왔다고 봄이 온 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이 분석인지 기대인지 불분명하지만, 이번 북-미 회담이 잘되길 바라지 않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한국이 이처럼 한반도 외교에서 뒷전으로 물러앉은 듯한 모양새의 시초는 천안함·연평도 사태를 비핵화 회담과 결부시킨 탓이 크다. 천안함·연평도 사태는 남북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이를 비핵화 회담과 분리시키지 않고 결합시키다 보니 결과적으로 북한 아닌 남한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딜레마에 빠졌다. “천안함·연평도 사과 없이 6자회담 없다”고 하다, 정세가 달리 돌아가자 “그 뜻이 아니고, 천안함·연평도가 6자회담의 전제는 아니지만, 영향을 미친다”는 복잡한 설명으로 한발 물러났다. 북-미 회담이 잘 이뤄지면, 천안함·연평도 입장을 또 바꿔야 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천안함·연평도 사태에 대한 미 국무부 브리핑의 답변은 한결같다. “남북한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선을 긋는다. 내심 천안함·연평도 문제가 비핵화 회담에 영향을 미치는 걸 꺼리는 눈치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이명박 정부는 고통스러운 선택만 남았다. 천안함·연평도 문제를 미국이 북-미 회담에서 꺼내주길 간청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비핵화 회담을 위해 천안함·연평도 입장을 또 수정해야 할 것인가? 이러니 북-미 회담이 잘 안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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