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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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으로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을 보면서 1987년 6·10 항쟁을 떠올렸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선배(?) 입장에서 유추해 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워싱턴 특파원으로, 미국의 입장이 뭔지를 점검하다 보니 1987년이 아닌, 1980년 한국이 자꾸 중첩된다. 미국은 사태 초기에는 사실상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에 대한 지지 뜻을 밝히다가, 시위가 점점 격화되자 시위대를 옹호하더니, 최종적(?)으로 ‘질서있는 전환’(orderly transition)으로 정책 방향을 잡았다. 이집트 시민들이 바라는 ‘즉각 퇴진’이 아닌. 그리고 이를 무바라크의 최측근인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이 조정하는 방안을 지지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런 기조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급진 반미세력이 정권을 장악할 가능성을 미국이 우려하기 때문이다. 80년대 대학가에서 미국을 바라보던 시각이 오랜만에 되새김질됐다. ‘미국의 제3세계 전략의 최우선은 친미 정권의 존속 여부다. 민주정부냐, 독재정부냐 하는 건 부차적 문제’라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집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 30년간 이집트의 그 ‘과거’를 지지해왔다. 무바라크 행정부는 미국의 정책에 적극 호응했고 미국이 원하는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도 지켜왔다. 미국의 대중동 정책 축은 크게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다. ‘질서있는 전환’이란, ‘전환’보다 ‘질서’에 무게중심을 둔 말이지만, 백악관과 국무부는 브리핑 맨 끝에 늘 토를 붙인다. “이집트가 나아갈 길은 이집트가 정하는 것”이라고.
물음이 떠오른다. ‘미국은 80년 한국에도 그랬을까?’라는 ‘데자뷔 현상’ 같은. 미국 행정부의 한 전직 관료에게 따지듯 묻자, “80년 한국도 그랬지만, ‘미국이 원하기만 하면 다 할 수 있다’는 과장된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기억하건대 ‘광주’ 이전, 민주화 세력에게는 미국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광주’에서 철저한 배신(?)을 당한 뒤, 80년대 대학가는 ‘반미’ 물결로 뒤덮였다. 그리고 88년 서울올림픽 미국과 소련의 농구 경기장에선 소련이 공을 넣을 때마다 함성이 솟구쳤다.
그러나 한국의 반미라고 해야 아스팔트에 레이건 대통령 얼굴 그려놓고 밟는 정도였다. 이슬람의 반미는 차원이 다르다. 어느 게 미국 국익에 더 부합할 것인가? 무바라크의 퇴진을 늦추는 게 오히려 급변사태를 유도하는 결과를 낳진 않을까? 이집트는 마치 80년 한국의 역할극 같다. 무바라크는 박정희, 술레이만은 최규하, 아므르 무사는 김영삼, 무함마드 엘바라데이는 김대중. 그런데 ‘전두환’은 아직(?) 안 보인다.
미국 전문가들은 이집트의 쿠데타 가능성을 낮게 본다. 대학생이던 87년 배낭여행으로 들른 서울에서 6월항쟁을 경험하고 한국 전문가로 인생항로를 바꾼 피터 벡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연구원은 “쿠데타도 모멘텀이 있다.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 워치’에 따르면, 벌써 300명이 죽었다. 쿠데타는 시위를 더 격화시켜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물었다. “80년 한국은 모멘텀을 못 넘었나?” 그는 “어렵다”며 답하지 않았다. 어설픈 분석 몇 개가 떠올랐지만 말하지 않았다.
이집트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한국의 80년, 87년, 97년? 보면 볼수록 5000년 나일의 후계 앞에 겸손해진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집트의 옛 시를 칼럼 말미에 적었다. “(사람들이) 나일의 물줄기를 바꿀 순 있으리, 그러나 나일을 마르게 할 순 없으리.”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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