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1.13 20:37
수정 : 2011.01.13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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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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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레이시스트’(인종차별주의자)는 가장 큰 욕이다. 미국인들은 대부분 자신이 관대하고 다양성에 열려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길 원한다.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하면, “나도 한국어를 잘 못한다”는 식으로 답하곤 한다. 그러나 짧은 기간 미국인(백인)들을 접하며 느낀 건, 도덕성에 기준을 둔 당위로 인종차별주의적 시각을 스스로 억누르고 있을 뿐 상당수가 인종적 우월론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2004년 미시간에서 연수할 때, 그 도시의 작은 지방언론사에 몇 주간 인턴처럼 다녔다. 당시 나를 데리고 시내의 취재현장을 함께 다닌 백인 여기자는 입사 5년차였다. 그는 내게 이것저것 얘기를 했다. ‘취재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등등. 그때 나는 입사 11년차였고, 그 직전에 5~6년차 기자들로부터 보고를 받는 사회부 기동취재팀장을 막 거쳤을 때였다. 그들의 눈에 나는 “한국에서 온, 영어도 잘 못하는, 뭔가 배우려고 온, 한국에선 기자였다고 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인종차별주의자라 할 순 없다. 그러나 다원주의자인 양 행세하는 미국인들에게서 실제론 “기준은 미국”이라는 강고함을 느낄 때가 많다. 한국에서 뭘 얼마나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시작은 미국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때 막 입사한 수습기자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기네 기준을 강요하는 차원을 넘어,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걸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늘 ‘울트라 머조리티’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중화주의가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고라면, 미국의 ‘미국중심주의’는 미국 외의 세상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식이다. 미국 시골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영어를 못하는 것을 “사람이 왜 영어를 못하지?”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다. 고등학생들 중에 캐나다가 미국 영토인 줄 아는 학생이 부지기수다. 미국이 자국의 프로야구 챔피언 결정전을 ‘유에스(U.S.)시리즈’가 아닌 ‘월드시리즈’라고 하는 것도 미국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미세한 인종차별, 강고한 미국중심주의가 미국인(백인)들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지만, 미국인들은 이를 에티켓이라는 외피로 감싸고 있다. 미국인들은 대개 겉과 속이 다르고, 입에 발린 소리를 잘한다. 한국 사회에선 “솔직하지 못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지만, 미국 사회에선 겉과 속이 다른 것을 “교양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애리조나 투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을 보면서 이런 미국인들의 습성이 연상됐다. 범인은 분명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범인을 키운 토양이 미국 안에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범인은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미군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그런 그가 유대인과 이민자(히스패닉)에 대한 증오를 차곡차곡 쌓아왔다. 개브리엘 기퍼즈 의원은 애리조나주 최초의 여성 유대인 연방 하원의원이다. 유대인과 이민자들에 대한 우월의식과 실존의 열등감이라는 이중적 심사가 기형화됐을 것이다. 지난해 보수주의 풀뿌리 운동단체인 ‘티파티’ 구성원들을 보면 백인 일색이다. 또 상당수가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서민층이다. 이번 사건과 겹쳐지는 대목이다.
과거 ‘분노’란 약자가 강자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자, 저항의 동력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분노’가 강자(또는 다수)가 약자에게 시위를 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를 많이 본다. 진보는 어느 사회에서나 대개 마이너리티다. 진보적 입장의 버락 오바마가 집권하고 있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보수주의 토대가 강한 남부 애리조나주에서 진보정치인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건, 그래서 더 비겁하고 위험해 보인다. ‘분노’는 마이너리티가 갖는 게 합당한 것 같다.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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