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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1.11 20:14 수정 : 2010.11.12 09:29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다. 육군사관학교에서 방위병으로 군대 생활을 했다. 육사에서 제일 큰 행사는 3월 초에 열리는 졸업식이었다. 대통령이 오기 때문이다.

새해가 되면 온통 졸업식 모드로 들어간다. 연대 단위의 행정병이었던 나의 주업무는 아침마다 각 대대에 ‘오늘 할 일’을 내려보내고, 저녁에는 각 대대로부터 ‘오늘 한 일’과 ‘내일 할 일’을 적은 보고서를 받아 정리하는 것이었다. 졸업식이 임박하면 1000명이 넘는 장병들의 휴가·외박이 모두 정지되고, 대통령이 들여다볼 가능성이 절대 없는 장병 숙소의 화장실 양변기에도 염산을 들이부어 하얗게 윤이 나게 만들었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들은 행여나 대통령께 해가 될까 미리미리 잘랐다. 박물관 현관에 있는 구한말 대포의 방향이 대통령을 향한다며 장병들이 낑낑거리며 방향을 돌려놓고, 식이 끝나면 다시 원래대로 옮겼다. 대통령 오신다고 곱게 깔아놓은 단상의 빨간 카펫은 전날 경호실 직원들이 북북 뜯어 밑을 확인한 뒤 다시 덮고, 그곳을 군인들이 돌아가며 밤을 새워 대통령 오시는 다음날까지 지켰다.

당일은 초비상이다. 경호실 직원, 헌병 천지에 건물 옥상마다 대공방어 시스템이 작동했다. 평소 외곽 경비를 맡는 방위병들이 이날은 모두 졸업식 관객이 되어 지시에 따라 박수를 치고, 대신 현역병들이 5m 간격으로 그 넓은 육사 전체를 에워쌌다. “예전에는 대통령 들어왔다 나가는 아스팔트 도로에 하이타이를 뿌려 걸레로 닦았다”는 이야기가 고참들의 입을 통해 전설처럼 내려왔다. 내가 근무했던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는 헬기로 이동하는 바람에 아스팔트 걸레질은 사라졌다.(더 자세한 언급은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삼가야 할 것 같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리는 서울의 상황을 전해들으니 문득 20년 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때 초점은 오직 한 사람, ‘대통령’이었다. 310명의 졸업생을 위해 뭘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다. G20 행사를 유치하기만 하면 갑자기 선진국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코엑스 마이크를 점검하고 의자를 바꾸라고 지시하는 대통령을 보면서, 그 세심함에 놀라기도 했지만 오히려 저개발국 풍경 같다는 못된 생각도 들었다. ‘현장 점검자가 무능하든가, 아니면 그냥 두어도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든가.’

청와대를 출입하던 2008년 11월, 첫 G20 정상회의가 열린 워싱턴에 왔었다. 그때도 국가원수가 지나가면 간간이 교통통제가 됐지만, 이번처럼 회의장 주변을 철통봉쇄하거나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뒤흔들진 않았다. 그때 숙소 호텔 옆에 있던 작은 나이트클럽에선 젊은이들이 새벽녘까지 춤추고 놀다 술에 취해 도로 위를 흐느적거리며 맨발로 걸어가는 장면도 지켜봤다. 미국 사람들은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았나 보다. 워싱턴에선 국제회의가 수시로 열린다. 지난 4월 열린 핵안보 정상회의에는 50개국 정상이 참가했다. 그런데 그 많은 정상들이 어디 다 숨어 지냈는지, 거리에선 역사상 최대 정상회의가 열린다는 걸 체감하기 힘들었다. 서울이 워싱턴 같을 순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국격’이라는 게 손님 온다고 집안 청소하고 부산 떨며 평소 못 먹던 고기 반찬 꺼내놓고 자랑하기보다,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게 더 격이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목놓아 외치는 선진국이라는 것도 국민소득으로만 따지는 건 1970년대 후진국의 셈법이다. 사회의 투명성, 공정성, 그리고 시민이 누리는 인권의 정도가 오히려 선진국의 기준이 되고 있다. 쓰레기와 대포폰, 어느 게 더 G20에 어울리지 않는가?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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