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1.04 20:21
수정 : 2010.11.0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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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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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우에노의 한 백화점은 요즘 외국산 명품 가죽제품 등을 예전 가격보다 15% 깎아 팔고 있다. ‘엔화 강세’로 외국 제품의 수입가격이 싸졌기 때문이다. 이 백화점은 엔-달러 환율이 79엔대로 떨어질 경우 할인율을 20%로 높이겠다며, 환율에 따른 할인율 표를 매장에 걸어놓기까지 했다. 미쓰비시유에프제이 파이낸셜그룹은 영국의 대형 은행인 로열 뱅크 오브 스코틀랜드(RBS)의 개발금융 부문을 인수하기 위해 최대주주인 영국 정부와 협상을 벌이고 있다. 자그마치 8000억엔(약 11조원) 규모다. 엔화를 쓰는 재미는 쏠쏠하다.
한 나라의 통화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그 나라의 경제력을 상징한다. 하지만 최근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일본의 수출 경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선진국 가운데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지금도 ‘회복’을 말하기 어려운 처지다. 그럼에도 엔화 가치는 2008년 10월 달러당 110엔에서 현재 80엔으로 급등해 있다.
전체로 보면 엔화 강세는 실이 훨씬 커 보인다. 수출 증가율은 지난 9월까지 7개월 연속 하락했고, 미약하게나마 회복하던 경기도 최근엔 제자리걸음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디플레가 더 이어질 것으로 보는 기업들은 국내 투자를 늘리지 않는다. 오히려 엔화 강세를 견뎌내기 위해 비용이 덜 드는 외국에서 부품을 조달하거나 완제품을 생산하는 비율을 늘리고 있다.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은 속수무책이다. 지난 9월 2조엔을 투입해 엔화를 달러당 85엔대로 끌어내렸지만 효과가 한 달을 못 갔다. 일본은행은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추고, 금융회사들에 초저금리로 자금을 대주며 엔화를 풀어보았지만, 헬리콥터로 달러를 뿌려대는 미국을 당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엔화 강세의 최대 수혜자가 일본과 경쟁하는 우리나라의 수출기업들이란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엔화값은 2008년 8월 100엔당 평균 953원에서 지난달엔 1371엔으로 40%나 올랐다. 이른바 ‘플라자 합의’가 있던 1985년 9월 이후 2년 사이에 47%가 뛴 것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다. 올해 하반기 들어 원-달러 환율이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엔-원 환율은 좀더 뛰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를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높은 환율로 인한 비싼 물가를 소비자들이 감내해가며 수출기업들에 사실상 보조금을 줘야 하는지부터가 의문이다. 물론 세계적인 수요부족 상황이니 국내 일자리를 위해 소비자들에게 좀더 참으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외부 환경이 언제까지나 약한 원화를 용인하진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 추세와 외국 자본 순유입 추세에 비춰볼 때 절상 속도는 매우 느린 편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외환시장 급변에 대응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는 것이다. 이번 세계 금융위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채권시장에서 외국인 투자가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지난해 3월부터 외국인이 거둔 채권 이자소득에 대해 세금을 면제하기로 하면서 투자가 급증해, 지금은 외국인 보유채권이 무려 75조원에 이른다. 한국은행은 통화정책을 펼 때 이제 이 자금의 움직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됐다. 달러 유입을 촉진하기만 한다면 뭐든 좋다는 단견의 결과물인 비과세를 지금이라도 철회하는 게 옳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정부가 수출기업들을 위해 언제까지고 원화 강세를 막아줄 것이라는 인식을 불식하는 일이다. 일본 경제가 가라앉는데 엔화 강세가 계속 진행될 리가 없고, 한국 경제가 대규모 경상흑자 속에 고성장을 하고 있는데 원화 강세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정남구 도쿄 특파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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