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0.28 21:21
수정 : 2010.10.2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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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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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60돌 기념일 다음날인 지난 26일, ‘장성택의 측근’으로 알려진 지재룡 신임 주중 북한 대사가 베이징에 부임했다.
중국과 북한이 사상 유례없는 밀월관계를 과시하고 있는 상황에 딱 어울리는 북한의 ‘실세 대사’다. 1994년부터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과 중앙선전부 부부장으로 활약한 지 대사는 김정은 후계구도가 확립된 9월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중국 지도자들의 정상회담에 배석조차 하지 못하는 ‘붙박이 연락책’에 불과했던 역대 북한 대사들과 달리, ‘실세 대사’인 지 대사가 북-중 전략·경제 관계를 얼마나 넓고 깊게 맺어갈지 예사롭지 않은 예감을 갖는 이가 많다.
베이징에서는 남북한 ‘실세 대사’의 본격적인 외교전이 펼쳐지게 됐다. 이명박 정부의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류우익 주중대사는 천안함 사건 이후 중국과의 난기류 속에서 만만치 않은 한해를 보냈다. 지난 25일 관영 <환구시보>는 “대중국 무역이 한국 무역의 20.5%를 차지하는 상황인데도 한국의 ‘중국통’ 인력이 극소수이고, 전임 대통령 비서실장을 주중대사로 임명했지만 대사의 중국어 실력이 부족해 깊이있는 교류에 한계가 있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를 인용했다. 이어 “하지만 한국의 대중국 외교 강화는 사고의 전환에서 시작해야지 인원 추가로 실현되는 게 아니다”라며 “한국의 ‘4강 외교’는 형식적으로 흐르고 실제로는 미국 일변도 외교를 추진하면서 한-미 관계만 잘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이 대중관계를 가로막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천안함 사건 이후 한-중 관계의 앙금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중 간 전략적 밀착의 속도는 놀랄 만하다. 북한과 중국이 언제나 굳건한 혈맹이었다는 오해와 달리, 양국 사이엔 갈등의 시기가 훨씬 길었다. 중국은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에서 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지원한 것)에서 인민지원군 18만명을 희생시키며 북한을 지원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 김일성이 친중 연안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중국군의 철군을 재촉했다. 이후에도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로 중국의 애를 태웠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1992년 한-중 수교와 2000년 들어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양국관계는 급랭했었다.
최근 북한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중국의 품으로 전면투항하고 있는 것은 60년 북-중 관계에서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북한으로선 천안함 사건 이후 한·미의 압력이 커지고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 후계체제를 조기에 안착시키기 위해 중국을 선택한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중국이 봉건적 ‘3대 세습’을 승인했다는 부담을 감수해 가면서 북한을 전면 포용하는 계산속은 무엇일까? 지정학적 견지에서 보면 북한의 세습이 중국에 핵심적 이슈는 아니며, 동북아에서의 영향력과 중국 동북지역의 안정을 위해 북한에 대한 전면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일 것이다. 이는 미국과의 경쟁에서 중국이 유리하게 활용할 카드이기도 하다. 미국은 북한의 미래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상황을 초조해하는 모양새다.
더 중요한 것은 북-중 관계가 강화되면서 한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도 오히려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 외에 전략·안보·국제외교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더욱 중시할 수밖에 없게 됐다. 얼마 전 만난 중국사회과학원의 한 학자는 “남북관계가 좋았을 때 한국은 북한 문제에 대한 영향력과 발언권이 있었는데 왜 스스로 그것을 버렸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베이징을 무대로 한 남북한 ‘실세 대사’의 외교전은 개인의 대결이 아닌, 역사와 미래를 고려한 전략의 대결이다.
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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