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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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관, 국회의원 등이 워싱턴에 오면 특파원들과 간담회를 하곤 한다. 큰 뉴스가 나오는 경우는 별반 없다. 지난 21일 김문수 경기지사와의 간담회도 그랬다. 그러나 김 지사는 유력한 대선후보군의 한 사람이기에 거의 모든 특파원이 참석했다. 김 지사는 대선 출마와 관련된 질문을 계속 피하면서 ‘애국주의’, ‘이승만 대통령’, ‘건국’ 등 다소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만 계속했다. 지루한 이야기가 계속되자, 한 특파원이 “예전 공활(공장활동) 할 때 찍은 사진 속 김문수와 지금 경기도지사 김문수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 운동을 하다 한나라당으로 전향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해묵은 의문을 도발적으로 던졌다. 김 지사는 별 불쾌한 기색도 없이 차분히 설명했다. “시골 몰락양반의 후손으로 가난하게, 그리고 가난을 수치로 생각하며 자랐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와 좌파 서클에 가입했고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 (1986년) 5·3 인천사태 때, 감옥에 간 뒤 소련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이후 1992년 민중당 운동을 시작했으나 해산명령을 받았고, 문민개혁 과정에서 민자당에 들어왔다.” 김 지사의 설명이다. ‘갈등이 없었느냐’는 물음에 “사상을 바꾸는 건 연옥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이 계속 따르는 것이다. 천재는 문득 깨닫는다고 하지만, 나는 천재가 아니다. 사상 전향이 한순간에 된 게 아니다. 소련과 동독의 붕괴 과정을 보면서 ‘풍요롭고 평등한’, ‘자유롭고 이타적인’, 이 모순적 가설을 조합한 공산주의는 허구라고 생각했다”고 김 지사는 말했다. ‘젊은 날을 후회하나’라는 잇따른 물음에 김 지사는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다. 후회하지 않는다. 나 때문에 감옥 간 사람이 50명이다. 그 사람들한테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치열하게 국민과 나라를 위해 살았던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고 답했다. 김 지사의 말을 들으면서, 청년시절 삶의 진정성은 알 것 같았다. 다만 전향 과정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고, 그가 겪었다는 그 ‘고통’이 너무 간략한 설명 때문인지 제대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는 이날 꽤 오랜 시간 ‘애국’을 강조했고, 나라사랑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육을 개탄하기도 했다. 김 지사는 전향 이유로, 인간의 본성이 마냥 착하지 않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그 불완전한 인간의 본성이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다는 건 또 가능한 것인가? 지금도 ‘애국가’를 들으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극장에 가면 불이 꺼지고 일어나 애국가를 들은 뒤 곧바로 <대한뉴스>가 나오고, 첫머리는 늘 ‘박 대통령 산업시찰’ 등이었던 게 각인된 탓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충효사상은 지고지순의 가치였다. 자연스레 ‘다른 생각’은 금지되었다. 지금은 그 충성을 바쳐야 하는 ‘나라’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의심이 든다. 한나라당과 김 지사가 주창하는 ‘국가 정통성’은 그때와는 또 무엇이 다른가? 이날 김 지사를 보면서 “인생을 평생 미적지근하게 산 사람보다는, 한때일지라도 열정적으로 산 사람은 분명 뭔가 다르다”는 작은 깨달음은 있었다. 그러나 김 지사 말의 일부는 내겐 겉돌거나, 이해되지 않거나, 납득되지 않았다. 김 지사는 일반적인 한나라당 인사들에게선 좀체 볼 수 없는 ‘야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 ‘야성’이 ‘저격수’의 자질로 쓰이거나, 오래전 세상을 떠난 이승만 전 대통령 숭배로 향하는 건 아까운 일 아닌가? 젊은 날 민중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던졌던 김문수의 진정성은 한때 운동을 한 ‘과거’가 아닌, ‘미래’가 판단할 것이다.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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