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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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시의 우라카미 성당엔 2m 높이의 아름다운 목조 성모상이 하나 있었다. 1945년 8월9일 이 성당에서 채 5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원자폭탄이 터졌다. 신자 1만2000여명 가운데 무려 8500여명이 죽었다. 성당도 폐허가 됐다. 두 달 뒤 사람들은 성당 잔해를 치우다가 다 타버리고 목 윗부분만 남은 성모상을 발견했다. 뺨이 까맣게 그을고, 수정 구슬로 해 넣었던 두 눈알이 녹아 없어져 버린 참혹한 모습이었다. ‘피폭 마리아’라는 새 이름을 얻은 이 조각상은 그대로 보존돼, 전쟁과 핵무기의 참상을 지금도 말없이 고발하고 있다. 이달 초엔 원폭을 투하한 미국에도 처음으로 건너가 뉴욕 성패트릭 대성당에서 일반에 공개됐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고 김형율을 생각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02년 8월 초, 부산에서였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채록해 가며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던 이들의 전국순례를 동반취재하던 중이었다. 그해 3월 자신이 ‘원폭피해자 2세’임을 세상에 처음 공개했던 그는 서른셋의 나이였다. 그런데 체중은 겨우 38㎏밖에 나가지 않았다. 일종의 선천성 면역결핍증으로 이미 폐기능의 절반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렵게 어렵게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원폭 근처에도 간 적이 없다. 다만, 어머니가 여섯살 때 원자폭탄이 터진 일본 히로시마에 있었던 게 원인이었다. 그 무렵부터 원폭 2세 문제 해결을 위해 본격적으로 발벗고 나선 그는 그 뒤 몇 번인가 서울 <한겨레>로 나를 직접 찾아와 새로운 자료들을 건네주곤 했다. 높고 가파른 계단을 홀로 힘겹게 걸어 올라온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내 성한 몸이 몹시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를 처음 만나던 무렵에 견줘 보면, 일제강점 피해자 문제 해결은 그사이 꽤 진척이 됐다. 2004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올해 초엔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법도 만들어져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의료비로 연 80만원을 우리 정부가 지급하는 등의 지원도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형율이 제기한 ‘2세 환우’ 문제 해결은 정부 차원에서는 아직 별 진전이 없다.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한 뒤 두 달 남짓 사이, 내가 일본에서 보낸 기사들도 그리 밝지가 않다. 일본 법원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낸 소송을 기각했다는 소식, 한-일 회담 관련 문서 공개를 일본 정부가 거부하고 법원이 이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소식 등을 전하는 마음은 무겁다. 일본의 새 정권이 뭔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이라는 기대는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피폭 마리아의 외국 나들이도 ‘원폭 피해자 일본’을 부각시키는 데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김형율을 처음 만난 그해 여름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태도가 바뀌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을 돌보는 것이다. 내켜하지 않는 일본으로부터 억지로 배상을 받고 면죄부를 주기보다는, 진실을 감추고 책임을 외면한 그들의 부도덕을 역사에 길이 남기는 편이 낫다. 그러려면 우리가 그들보다는 훨씬 도덕적이어야 한다. 국민을 돌볼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숨죽여 지내는 ‘2세 환우’들을 위해 생의 마지막 3년을 불태운 김형율이 세상을 떠난 지 29일로 5년이 된다. 일제의 조선 강제합병 100년을 맞는 올해, 그가 살아 있다면 ‘내 나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가빠 온다. 정남구 특파원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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