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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18 21:37 수정 : 2010.01.18 21:37

권태호 특파원

지금도 그때 내 기억이 맞는지 스스로 의심이 날 때가 많다. 1995년 삼풍백화점 사고가 났을 때, 나는 동대문경찰서 사건기자였다. 처음에는 백화점 가스가 폭발한 것 같다는 소식만 듣고 저녁 무렵 꽉 막힌 잠수교 위에서 ‘겨우 가스 폭발한 것에 이제 3년차씩이나 된 나를 보내나’ 하고 은근히 경찰팀장(캡)을 원망하며 어렵게 삼풍백화점 참사 현장에 닿았다. 두 기둥만 남고 폭삭 무너져버린 참사 현장을 보고 무엇을 어찌해야 될지 방도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며칠 뒤에는 콘크리트 더미에 끼여 거꾸로 매달린 채 덜렁거리는 시체 아래서 소방대원들과 함께 태연히 점심을 먹었다.

15년 뒤, 이젠 워싱턴 특파원으로 아이티 참사 현장에 왔다. 삼풍 때도 그러했지만, 이번에도 아무 대책 없이, 그때 캡의 지시를 따랐던 것처럼, 국제부문 편집장의 지시에 무작정 짐을 쌌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국경을 넘었다. 국경만 넘으면 참혹한 현장이 펼쳐질 것만 같았는데, 차창 옆에는 커다란 호수가 마주 달렸고, 호수 너머 푸른 산, 푸른 하늘은 눈이 시리게 아름답기만 했다. 지나는 시골마을도 가난하지만 평온해 보였다. 그러자 오히려 조급해지는 ‘기자의 악마성’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포르토프랭스 시내에서 ‘그리 원하던’ 참혹한 현장을 수도 없이 보게 됐는데, 사람들의 무표정은 잘 적응이 안 됐다. 거리의 시체는 다 치웠다는데도, 무너진 벽돌 더미 옆쪽 잿빛 가운 아래로 흙빛 발바닥 두 개가 있다. 사람들은 무덤덤하게 그 옆을 지나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 속에 무슨 생각이 서려 있는지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이 알기란 힘들었다. ‘왜 사람들이 울지 않지?’라는 생각만 고개를 들 뿐. 상갓집 시어미처럼.

아이티의 1인당 국민소득은 연간 500달러 안팎이다. 가난은 슬픔도 둔하게 만든다. 우리도 가난한 집 초상은 앞으로 남은 이들이 살아갈 걱정이 슬픔을 집어삼킬 때가 많다. 10만명이 숨졌다는 아이티는 상갓집이라기보단 배고픔이 먼저 와 닿았다.

아이 손을 잡고 도미니카 산토도밍고행 버스를 타려는 한 아낙네가 요금이 100달러라는 말에 하염없이 우는 걸 본 게 내가 본 거의 유일한 ‘아이티의 눈물’이다. 긴급구호를 위해 이곳에 온 한 목사님은 “가난하다고 왜 슬프지 않겠습니까? 워낙 힘드니 슬픔은 가슴에 묻는 것이겠지요”라고 아이티 사람들을 대변했다.

구호물품을 나눠준다는 소문을 듣고 수백명이 모인 공설운동장 문 앞 한켠에서 20대 젊은 처자가 팬티만 입고 젖가슴을 다 드러낸 채 몸을 씻고 있었다. 그런 여인이 서너명이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별반 이상히 바라보지 않는 듯하다. 가난은 부끄러움도 둔하게 만드는지.

그러나 아침이 되니, 열두셋쯤 되었을까 텐트촌에서 나온 계집아이가 고슬고슬한 머리를 빗으로 연신 빗고 있다. 예쁜 게 뭔지 알 나이다. 참혹한 현장과 화가 잔뜩 난 듯한 군중의 무리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공 하나를 갖고 빈터에서 맨발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임시로 묵고 있는 아이티의 백삼숙 선교사님 댁에 사는 7살짜리 고아 자스민은 기자에게 서툰 한국말로 “사진 찍어 주세요” 하고서, 찍은 자기 사진을 바라보며 천진하게 웃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처럼. 대낮 거리에는 연인인지 부부인지, 한국의 한여름과 비슷한 아이티의 요즘 날씨에 무너진 건물 앞을 두 손 꼭 잡고 지나가는 남녀가 있었다.


권태호 특파원 포르토프랭스(아이티)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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