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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2.28 19:18 수정 : 2009.12.28 19:18

권태호 특파원

이명박 대통령이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에게 전화를 건다. “(…)운하 아니라니깐 그러네. 운하는 내가 하고 싶어도 이젠 때 놓쳐서 못해요. 그런데 4대강, 이건 해야 돼요. 권 의원 지역구(창원)도 낙동강 하구잖아, 여름마다 물 넘치고 그러면 보기 좋아요? ‘4대강 준설토 처리비용 1조 넘는다’는 권 의원 보도자료 봤는데, 그렇지 않아요. 내가 함바 밥만 30년 먹었소. 이건 내 전공이잖소. 다시 부탁하는데, 적당히 해줘요. 권 의원이나 나나 내일모레 칠십이오, 우리 나이에 너무 오래 서 있으면 무릎 다 나갑니다. 그리고 민노당엔 젊은 사람 많잖아요, 뭐하러 직접 나서요?”

만일 우리 국회에도 합법적인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가 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미국 상원의 의료보험 개혁안 처리 과정과 우리 국회의 4대강 사업 예산 협상을 동시에 보며 든 ‘건방진’ 상상이다. 미 의보개혁안 처리 과정을 보며 우리 국회가 자주 연상됐다. ‘게임 끝났다’는 판단이 서자, “빨리 끝내고 휴가나 가자”며 애초 표결시간인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7시를 아침 7시로 앞당기는 것도 우리로선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긴 했다.

개인 의견이 다르다며 반대를 표하는 벤 넬슨 상원의원, 한 사람을 설득하느라 의회 지도부, 백악관, 그리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달려들어 13시간 협상, 결국엔 그 의원 뜻에 따르는 과정 등이 낯설었다. 지난 11월7일 통과된 하원 표결에선 과반수인 218표에서 단 두 표 넘어선 220표, 지난 24일 상원 표결에선 필리버스터를 막을 최소한의 표인 60표(민주 58+무소속 2)를 딱 맞췄다. 한 표, 한 표가 귀할 수밖에.

당 지도부가 ‘공천’이란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데, 우리 의원들한테 ‘왜 미 의원들처럼 제 목소리를 못 내느냐’고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 자기 선거구 주민들의 의견을 따른 넬슨 의원이 대단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찬반양론이 있지만, 요즘 같다면 우리 국회에도 미 상원처럼 필리버스터가 있으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해본다. 미 상원에서 필리버스터가 없었더라도, 민주당이 공화당을 포함해 의원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하는 데 그렇게 애를 썼을까? 이미 의석의 58%를 차지하고 있는데….

의석 299석의 우리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169석(57%)을 갖고 있다. 기술적으로만 따지면 야당 지지가 없어도 상관없다. 미국처럼 60%를 넘지 못하면 필리버스터를 막을 수 없다면? 한나라당은 180표를 얻어야 한다. 그러면 매번 친박연대(8석) 외에 세 표를 더 구해야 한다. 얻지 못하면 장시간 발언 등 온갖 형태의 필리버스터가 등장할 것이다. 이 점에선 어느 누구도 우리 국회의원들의 창의력과 끈기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미 상원은 이른바 무소불위(?)의 ‘다수결의 원칙’을 넘어 ‘50~60%’의 완충지대를 뒀다. 사실 이는 효율성, 속도와는 거리가 멀다. 모든 게 안정된 선진국과 하루하루가 급한 개도국이 동일한 제도를 실시하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의회 문화의 시계가 ‘구국의 결단’ 식의 60~70년대에 멈춰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이행하더라도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건가?

4대강 사업을 하는 게 옳은지, 않는 게 옳은지 기술적·과학적으로 나는 잘 모른다. 다만 강행처리로 사업이 진행되고, 그리고 성공리에 끝난다면, 우리 의회 문화는 한 걸음 더 퇴행할 것 같다. 그 퇴행이 의회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 사회 전반으로 퍼진다는 게 더 두렵다.

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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