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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1.02 21:25 수정 : 2009.11.02 21:25

박민희 특파원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의 큰아들 마오안잉의 생애는 비극적이었다.

아버지가 혁명을 위해 공산당 근거지로 떠난 뒤 어머니 양카이후이는 국민당 세력들에게 지독한 고문을 당한 뒤 처형당했다. 8살이었던 안잉은 어머니의 처형을 지켜봐야 했다. 아버지와 떨어져 상하이의 지하 공산당원들의 손에 키워졌고 한때는 거리의 고아로 지내기도 했다. 모스크바에서 공부하고 2차대전을 겪은 뒤 중국으로 돌아왔다. 1949년 사랑하는 여인 류쑹린(류쓰치)과 결혼했지만 1년도 안 돼, 한국전쟁에 참전해 북한을 지원하느라 1950년 10월25일 압록강을 건넜다. 평안남도 회창군에 위치한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그는, 1950년 11월25일 미군 폭격기가 투하한 네이팜탄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반세기도 넘어 그가 다시 중국인들에게 돌아왔다.

지난달 말 후난성에선 드라마 <마오안잉>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등이 제작하는 이 드라마는 마오안잉의 짧은 삶과 죽음, 아버지와의 관계 등을 그릴 예정이다. 마오안잉이 숨졌을 때 19살이던 부인 류쑹린이 제작발표회에 나와 아직도 잊지 못하는 남편을 기리는 모습은 언론의 초점이 됐다.

지난달 초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북한 방문 때 중국 언론이 가장 공들여 보도한 것은 중국인민지원군열사묘를 찾아간 원 총리가 마오안잉의 묘 앞에서 감정에 북받친 목소리로 “안잉 동지, 이제 조국은 강해졌습니다. 인민은 행복해졌습니다. 편히 쉬십시오”라고 위로하는 모습이었다.

북한을 위해 목숨을 바친 중국 최고 지도자의 아들, 북-중 혈맹관계의 상징인 마오안잉이 새롭게 부각되는 것은 북-중 관계의 풍향계가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징표다.

북-중 사이의 교류 움직임은 부쩍 활발해졌다. 지난달 말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최태복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를 면담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을 초청했고, 김 위원장이 언제 중국을 방문할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변을 따라 북-중의 경제적 접근도 빨라지고 있다. 중국은 북-중 접경지역에 ‘퉁단 경제벨트’를 구축해 경제특구로 개발하면서 철로와 다리를 새로 건설해 북한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수송해낼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북한이 중국의 ‘동북 4성’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중국 언론과 인터넷에 비친 북한 이미지도 크게 달라졌다. 최근 관영 <환구시보>에는 북한에 유학중인 중국 학생들이 “근면하고 애국적인” 북한의 모습을 호평하는 기사들이 실려 큰 관심을 끌었다. 중국 좌파들은 우파들에 의해 날조된 북한 이미지와 모욕적 편견들을 바로잡겠다며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중국 지도부가 북한에 환멸을 느꼈으며 북-중 혈맹관계가 더는 예전 같지 않다는 그동안의 통념을 뒤집는 현상들이다. 올해 북한의 2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이후 중국이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에 참여하자, 이를 통해 북한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한국 정부의 계산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가는 현실이다.

왜 중국은 북한을 다시 끌어안기로 했을까?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국제관계에서 중국은 냉정한 검토 끝에 전략적으로 북한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통해 미국의 패권을 흔들 수도 있고,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해 북한을 중국에 예속시키는 것이 유리하다는 계산일 것이다. 중국이 전략적 필요에 따라 북한과 혈맹의 우의를 다시 다지고 있는 지금, 남북관계를 방치하고 있는 한국에는 어떤 전략적 카드가 남아 있는가?

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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