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8.24 21:37
수정 : 2009.09.1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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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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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마감을 마쳤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 장면을 보여주는 위성방송을 접했다. 2시간 늦은 실황중계다. 국회 영결식, 서울시청 앞, 동교동 자택, 그리고 연도에 운집한 시민들을 보며 아침을 맞았다.
그러면서 ‘김대중’을 추억했다. 나는 김 전 대통령을 딱 한 번 마주쳤다. 1997년 대선 당시, 취재차 내려간 대구의 한 호텔 조찬강연회였다. 열띤 목소리로 ‘지역감정 해소’를 외쳤지만, 모인 100여명은 대부분 관계자들이었고, 취재 온 기자는 나 혼자였다. 그는 강연 뒤, ‘홀로 기자’인 내게 다가와 악수를 건넸고,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악수다.
내 고향은 대구다. ‘김대중’을 본 적도 없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김대중=빨갱이’라는 등식을 어른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랐다. 그러다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김 전 대통령이 간첩을 만나 지령을 받고, 시위 자금을 대학생에게 건네고, 광주항쟁을 조종했다고 했다. 나는 당시 중학생이었다. 이전에 그토록 ‘김대중=빨갱이’를 되뇌던 집안 어른들이 정작 ‘김대중=빨갱이’가 공식 선언된 그땐 별말이 없었다.
대학에 들어간 직후 85년 가택연금에서 풀린 날, 김영삼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위원장이 동교동으로 달려가 서로 부둥켜안고 활짝 웃던 신문 사진을 보며 참 가슴 뿌듯했는데. 그런데 87년 6월항쟁이 단일화 실패로 먹칠당했을 때, 나는 왜 ‘김영삼’보다 ‘김대중’에 더 분노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봤던 ‘민중혁명’을 얘기하던 과격한(?) 친구들이, 정작 대선 국면에서 기존 정치인인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돌아서던 걸 보며 많이 혼란스러웠던 때를 기억한다. 입 밖에 꺼내진 못했지만, 그 친구들 상당수가 ‘호남 출신’이란 점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돌이켜보면, 그건 모두 나의 ‘지역감정’이었던 것 같다. 훨씬 더 많은 ‘비호남 출신’ 비판적 지지자들이 있었는데, 내 눈엔 ‘호남 출신’만 보였던 것이다.
92년 대선 패배 다음날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하루 전날까지 그토록 김대중을 공격했던 한 보수신문이 ‘거인의 퇴장’이라며 그의 뒷모습을 크게 싣고 칭송으로 가득 찬 보도를 한 것도 퍽 인상적이었다. <한겨레>에 입사한 뒤에는 ‘김대중’에 대한 견해 차이로 회사 여기저기서 논쟁이 끊이지 않았음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 워싱턴에서 생전에 그를 알던 이들의 말에는 진심으로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칭송과 안타까움이 묻어남을 알 수 있었다. 워싱턴 망명 시절, <워싱턴 포스트> 기자였던 셀리그 해리슨은 서거 며칠 전, ‘김 전 대통령의 회복은 힘들다’는 소식을 전하자 한동안 말을 잊다가 눈물을 글썽였다.
그의 워싱턴 흔적을 하나하나 밟으면서 그의 망명시절이 어떠했는지도 어렴풋이 알았다.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 살며 온종일 ‘일’에만 매달려 3년간 본 영화는 <간디>가 유일했고, 후원금은 “생활비가 아니라 활동비로 써야 한다”며 그 돈으론 쌀 한 포대 사려 하지 않았다. 평생에 걸쳐 ‘마이너’였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잊혀졌던 ‘용산 희생자’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김 전 대통령은 평범한 이들의 삶의 부분부분마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떠나면서 사람들을 참 많이 미안하게 만든다.
정치 신인 시절, 김 전 대통령은 “과오를 개혁하려는 자들에게 순교의 횃불을 들어준다는 점에서 정치는 종교와 같다”는 토머스 제퍼슨의 경구를 맘에 붙들었다. 그 경구는 그의 죽음 뒤에 남은 자들에게도 유효할 것 같다.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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