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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6 17:42 수정 : 2020.01.08 11:18

“중동의 시아파들에게 그는 제임스 본드, 에르빈 로멜, 레이디 가가를 하나로 합친 것과 같다.” 2017년 미국 <타임>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으로 선정한 이란의 가셈 솔레이마니 쿠드스군 사령관에 대해 전직 미국 중앙정보국(CIA) 분석가가 썼던 표현이다.

수십년 전 미국이 ‘제거’한 이란의 또 다른 영웅 역시 공교롭게 1951년 <타임>이 뽑은 ‘올해의 인물’이었다. 35대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크(1882~1967)는 재임 2년간 실업급여 도입, 토지개혁 같은 사회개혁뿐 아니라 석유산업 국유화를 주도한, 이란의 ‘반외세 전통’과 ‘세속 민주주의’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때까지 이란 석유에 ‘빨대’를 꽂다시피 했던 영국은 모사데크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국제시장에서 대대적인 이란 석유 보이콧을 이끄는 한편, “그대로 두면 이란이 공산주의화할 것”이라며 미국 아이젠하워 정부에 ‘모사데크 축출 작전’을 제안한다.

1953년 4월 작전을 승인받은 미 중앙정보국은 이란의 정치인, 성직자, 언론인을 매수하고 공산주의 성향의 투데당원으로 위장시킨 이들을 통해 모사데크 연대세력을 이간질하며 ‘반모사데크 선동’을 퍼뜨렸다. 한해 전 모사데크와 충돌했다가 국민의 거센 반발을 산 바 있어 주저하는 팔레비 국왕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위기에 대응하며 모사데크 역시 ‘독재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침내 그해 8월, 로마로 빠져나간 팔레비 국왕이 모사데크를 해임하고 미국이 고른 자헤디 장군을 새 총리로 임명하는 문서에 서명한다. 당시 나흘간 이란 곳곳에서 벌어진 격렬한 시위대의 충돌로 300명이 숨졌는데, 양쪽 시위대엔 모두 미 중앙정보국 사주를 받은 거물 폭력배 등이 활약했다. 약탈과 방화, 혼란을 빌미로 나선 쿠데타 세력은 모사데크를 체포하고, 로마에서 돌아온 팔레비 국왕은 1979년 호메이니 혁명 전까지 26년간 친미독재 왕조를 지속할 수 있었다. 모사데크는 3년형을 산 뒤 숨질 때까지 가택에 연금됐다.

2013년에야 공식문서가 공개된 이른바 ‘아약스 작전’은 미국 정보국이 평시 해외 체제전복에 개입한 첫 작전으로 평가된다. 1979~1981년 444일간 지속됐던 테헤란 미 대사관 인질사건이 상징하는 이란의 ‘반미 감정’이 시작된 계기로도 미국에선 꼽힌다. 2000년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아이젠하워 정부는 이 작전이 전략적 이유로 정당화된다고 봤지만, 쿠데타는 명백히 이란 정치발전의 후퇴였다. 미국의 이 개입에 왜 이란인들이 계속해서 분노하는지 알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에 미국은 수십년 뒤 어떤 평가를 내릴까.

김영희 논설위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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