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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0 18:36 수정 : 2019.12.11 02:38

노지원 ㅣ 통일외교팀 기자

지난 10월18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주한외교단 초청 리셉션이 열리던 중이었다. 대학생 등 17명이 사다리를 타고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주한미국대사관저 담을 넘었다. 마당에서 ‘미군 지원금 5배 증액 요구 해리스는 이 땅을 떠나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어 보였다. 대학생들은 곧 경찰에 끌려나왔고, 건조물 침입 등 혐의로 체포돼 경찰서로 연행됐다.

녹지원 행사에 함께 있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미국을 담당하는 북미국장 등 외교부 주요 간부들은 해리 해리스 대사한테 다가가 대사관저에서 벌어진 사건과 경찰의 조치 상황 등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은 직접적으로 미안함과 유감의 뜻을 표시했는데, 이에 대한 해리스 대사의 반응이 다소 뜻밖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신은 미안해야 한다. 그건 당신의 책임이다.”(You should be sorry. It is your responsibility.) 김 차장에 대한 해리스 대사의 ‘질책성’ 발언에 함께 있던 이들이 적잖이 놀랐다는 후문이다.

최근 해리스 대사의 ‘설화’가 정치인의 입, 언론 보도를 통해 속속 외부에 알려지고 있다. 해리스 대사는 한·미가 지난달 18~19일 서울에서 방위비 분담 협상을 하기 며칠 전, 국회 정보위원장인 이혜훈 의원(바른미래당)을 비롯해 여러 야당 의원을 대사관저로 불렀다. 정치인들은 해리스 대사가 ‘분담금 50억달러’를 대놓고 주장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 의원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너무 무례하다” “수십년 많은 대사들을 만났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라고 했다. 해리스 대사가 지난 9월 여야 의원들을 만나 “문재인 대통령이 ‘종북 좌파’에 둘러싸여 있다는 보도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사실이 최근 뒤늦게 알려지면서 다시 한번 논란이 되기도 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실상 동맹국의 대통령과 그 행정부를 색깔론적 언사로 모욕한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대사들은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동시에 주재국의 입장 또한 잘 헤아려 본국에 전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그런데 해리스 대사는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과거엔 미국 관료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비밀에 부쳤는데, 계속 말이 새나가고 있다. 일종의 ‘폭로’가 이어지는 셈이다.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이들조차 대사의 발언이 부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해리스 대사를 직접 만나본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비슷했다.

한달 전 급기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해리스 대사를 추방하자’는 취지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해리스 대사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외교상 기피 인물)로 선언하고 추방하자는 전례 없는 요구다. 10일 현재 1400여명이 서명한 상태다. 한국이 단 하나뿐인 동맹국인 미국을 대표해 한국에 와 있는 대사를 추방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다만 미국 대사에 대한 한국 여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해리스 대사의 ‘말’을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지는 현 상황은 한-미 관계를 대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가치관, 태도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 노골적인 압박을 동원해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태도다. 상대가 동맹국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3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문제를 곧장 방위비 분담금과 연결지으며 ‘미군을 주둔시키려면 공정하게 분담해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한 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뒤 미국 관료가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언행을 하고 나아가 한-미 동맹에 생채기를 내도, 설사 그게 외부에 알려지더라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는 이제 한-미 관계에서 ‘뉴 노멀’이 된 듯하다.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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