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15 17:57
수정 : 2019.10.16 14:43
정대하
전국1팀 선임기자
요트에서 월척을 들고 있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묻어 있다. 사진 속의 배경은 뉴질랜드 바다였다. 한때 계열사 41개를 거느린 재계 50위권의 대주그룹 소유주였던 허재호(77) 전 회장은 낚시광이다. 2008년 금융위기의 파도를 넘지 못하고 부도가 난 뒤 뉴질랜드로 출국했던 그는 여전히 재기를 꿈꾸는 ‘청년’ 같다. 그는 아들 회사의 고문 자격으로 현지에서 1천억원대 아파트 분양 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며칠 전까지도 그의 카톡 프로필엔 나비넥타이를 맨 채 결혼식을 올렸던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허 전 회장의 일상을 추적하는 이유는 그가 아직도 갚아야 할 빚과 피해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예금보험공사 채무는 79억원이고,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도 331억원 이상의 채무가 남아 있다. 차명주식을 처분해 발생한 양도소득세 63억원도 내지 않은 상태다. 그가 경영했던 그룹 계열사 때문에 피해를 본 이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경기도 용인 공세지구 분양자들은 분양대금 반환 청구소송에서 승소하고도 계약금과 위약금 140억여원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대주건설 관련 일을 하다가 21억원을 떼인 하청업체 대표는 막노동을 하고 있다.
허 전 회장이 평안한 노후를 보내는 것은 모두 검찰의 봐주기 수사 탓이다. 검찰은 2014년 3월 일당 5억원의 ‘황제노역’으로 공분을 산 허 전 회장의 국내외 은닉재산 의혹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당시 검찰엔 국세청 고발 사건 2건과 고소 사건 4건이 접수됐다. 하지만 허 전 회장이 미납 벌금을 완납하자 수사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이어 광주지검 특수부는 2015년 7월 6건 중 5건을 무혐의 처분하고, 1건만 참고인 중지 처분을 내렸다. 참고인 중지는 중요한 증인을 찾지 못해 수사를 계속할 수 없을 때 하는 처분이지만, 슬그머니 사건을 덮을 때 쓰는 수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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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 거주 중인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요트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다. 오클랜드 교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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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똑 떨어지는 국세청 고발 사건마저도 그냥 넘어갔다. 그러자 국세청이 검찰의 무혐의 처분에 반발했다. 광주고검은 서울지방국세청의 항고를 받아들여 2015년 12월 ‘재기수사 명령’을 내렸지만, 광주지검은 또다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검찰이 허 전 회장의 차명주식 조세포탈 사건을 아직까지도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 뒤에야 밀쳐둔 숙제를 꺼내 들었다.
조세포탈 사건을 5년 동안 뭉갠 검찰은 지난 7월에야 그를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 인사가 있기 나흘 전이었다. 수사 중단의 원인이 됐던 주요 참고인이 허 전 회장과 사실혼 관계였던 골프장 여주인이었다는 사실도 이번에야 드러났다. 그러나 국세청이 2015년 고발한 ㈜코너스톤홀딩스의 조세포탈 사건은 여전히 묻혀 있다. 코너스톤홀딩스는 대주건설 법인들의 부실채권 1153억원어치를 헐값인 61억원에 낙찰받은 뒤 숨겨진 자산을 추심해 1천억원대의 수익을 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허 전 회장 고소·고발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들이 모두 잘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허 전 회장 사건의 무혐의 처분을 지휘했던 검사나, 선배 검사가 중단했던 사건을 재수사해 허 전 회장을 기소했던 검사 모두 검찰의 요직에 있다. 이들에게 허 전 회장 사건에 대해 묻자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답변했다.
이런 수사 태도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이는 허 전 회장이었다. 과거 검찰에 탄탄한 인맥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그다웠다. 허 전 회장은 “검찰 인사를 앞두고 얼마나 급했는지 공소사실 동의도 받지 않고 기소를 해버렸더라”고 꼬집었다. 25일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돼 광주지법 첫 공판기일을 앞둔 그가 귀국하지 않고 혹 제삼국으로 도주라도 한다면 봐주기 수사 논란은 더 이어질 것이다. 황제노역 이후 수사 행태를 쫓다보면 검찰개혁의 필요성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진다.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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