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팀 데스크 경제분야 취재를 막 시작했을 때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취재기자가 보내온 기사를 손질하던 경제부장 입에서 혼잣말처럼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또 김상조네.” 여기서 김상조는 바로 청와대 정책실장을 맡고 있는 김상조 당시 한성대 교수다. 그는 당시 경제개혁연대라는 시민단체를 이끌며 왕성하게 활동 중이었다. 그 주 부서회의 때 경제부장은 기어코 부서원에게 한 소리 했다. “김상조 교수 말고 없나?” <한겨레> 경제 기사에 김 교수 등장이 너무 잦으니 다른 전문가도 물색해보라는 취지였다. 마침 그날 지면엔 김 교수가 세차례나 등장했다. 풋내기 경제기자이던 나 또한 평소 같은 문제의식이 있었다. 선배들이 ‘게으른 것 아닌가’ ‘타성에 빠진 듯하다’는 불경(?)한 마음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부딪쳐본 취재 현장은 말처럼 간단치 않았다. 애초 품은 의구심이 온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김상조’만 인용하는 선배 기자들의 난감함도 알 듯했다. 경제 이슈에 전문적인 식견을 보여주는 ‘코멘트’ 받기가 쉽지 않았다. 외려 새로운 코멘테이터를 발굴하기 위해 유수의 대학교수들에게 전화를 돌려보면, ‘경제 현안’에 무감각한 이가 태반이었다. 간혹 어렵게 찾은 ‘실력자’들은 실명 인용을 꺼렸다. 이쯤 되니 당국과 기자보다 현안을 더 세세하게 들여다보며 의견까지 내는 김상조 교수가 남달라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미디어에 등장하는 수많은 코멘테이터들은 뭔가’란 의문을 독자들은 가질 법하다. 사실 구색 맞추기용 코멘테이터는 넘친다. 주의하라. 여러 매체에 빈번하게 코멘트하는 ‘그들’은 사실 다른 의도가 있는 경우가 많다. 미디어 노출로 얻은 얄팍한 유명세를 지렛대 삼아 작게는 크고 작은 정·관계 토론회 참석이나 용역 프로젝트 수주 기회를 얻으려 하거나 크게는 정계 진출이나 장관, 공공기관 기관장과 같은 ‘큰 뜻’(?)을 이루려 한다. 목적이 이러하기에 그들의 코멘트는 전문적 식견이나 통찰과는 거리가 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이거나 특정 세력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뿐이다. 특히 요즘처럼 진영 대립이 치열한 시기엔 ‘폴리페서’인지 ‘앙가주망’인지 구분하기 힘든 전문가가 창궐한다. 이에 들어맞는 여러 ‘교수님’ 얼굴이 떠오르지만 이름을 여기에 적지는 않겠다. 구색 맞추기 인용은 독자에게도 누가 될까 싶어 언제부턴가 나는 전문가 코멘트를 아예 쓰지 않는 경우가 늘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들’을 비난하려 함이 아니다. 외려 내공 깊은 전문가들이 얼굴을 드러내길 바라고, 그들이 경제 현안에도 관심을 보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최근 만난 한 대학교수에게 이런 얘기를 꺼냈더니, 다음과 같은 촌평을 내놨다. “경제학에 밝은 교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당장의 경제 현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고민하는 교수는 드물다고 보면 된다.” 대학이란 현실 세계를 탐구하고 문제점을 찾아내며 해법을 모색하는 공간이라는 교과서적 인식과 실제 학계 풍토는 거리가 한참 멀다는 뜻이다. 시선을 나라 밖으로 돌리면 이런 학계의 모습은 상아탑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나 전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 벤 버냉키 전 프린스턴대 교수, 올리비에 블랑샤르 전 매사추세츠 공대(MIT) 교수 등은 경제 현안이나 정책에 대한 견해를 자신의 블로그나 언론 매체에 분명히 드러낸다. 이들의 활동을 놓고 어디에서도 ‘정치권에 줄 대기’라거나 ‘(전문성이 결여된) 얄팍한 견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들 석학의 활동은 공론장을 풍성하게 하고 경제 정책가들을 자극하는 긍정적 효과를 내고 있다. 물론 “미국 사회에서도 공론장에의 적극 참여는 석학들만의 특권”(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위원)이라는 평도 있지만 코멘트 받으려 동분서주해야 하는 ‘기자’로선 부러운 풍경임에 틀림없다. sp96@hani.co.kr
칼럼 |
[한겨레 프리즘] 또 김상조야? / 김경락 |
산업팀 데스크 경제분야 취재를 막 시작했을 때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취재기자가 보내온 기사를 손질하던 경제부장 입에서 혼잣말처럼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또 김상조네.” 여기서 김상조는 바로 청와대 정책실장을 맡고 있는 김상조 당시 한성대 교수다. 그는 당시 경제개혁연대라는 시민단체를 이끌며 왕성하게 활동 중이었다. 그 주 부서회의 때 경제부장은 기어코 부서원에게 한 소리 했다. “김상조 교수 말고 없나?” <한겨레> 경제 기사에 김 교수 등장이 너무 잦으니 다른 전문가도 물색해보라는 취지였다. 마침 그날 지면엔 김 교수가 세차례나 등장했다. 풋내기 경제기자이던 나 또한 평소 같은 문제의식이 있었다. 선배들이 ‘게으른 것 아닌가’ ‘타성에 빠진 듯하다’는 불경(?)한 마음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부딪쳐본 취재 현장은 말처럼 간단치 않았다. 애초 품은 의구심이 온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김상조’만 인용하는 선배 기자들의 난감함도 알 듯했다. 경제 이슈에 전문적인 식견을 보여주는 ‘코멘트’ 받기가 쉽지 않았다. 외려 새로운 코멘테이터를 발굴하기 위해 유수의 대학교수들에게 전화를 돌려보면, ‘경제 현안’에 무감각한 이가 태반이었다. 간혹 어렵게 찾은 ‘실력자’들은 실명 인용을 꺼렸다. 이쯤 되니 당국과 기자보다 현안을 더 세세하게 들여다보며 의견까지 내는 김상조 교수가 남달라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미디어에 등장하는 수많은 코멘테이터들은 뭔가’란 의문을 독자들은 가질 법하다. 사실 구색 맞추기용 코멘테이터는 넘친다. 주의하라. 여러 매체에 빈번하게 코멘트하는 ‘그들’은 사실 다른 의도가 있는 경우가 많다. 미디어 노출로 얻은 얄팍한 유명세를 지렛대 삼아 작게는 크고 작은 정·관계 토론회 참석이나 용역 프로젝트 수주 기회를 얻으려 하거나 크게는 정계 진출이나 장관, 공공기관 기관장과 같은 ‘큰 뜻’(?)을 이루려 한다. 목적이 이러하기에 그들의 코멘트는 전문적 식견이나 통찰과는 거리가 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이거나 특정 세력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뿐이다. 특히 요즘처럼 진영 대립이 치열한 시기엔 ‘폴리페서’인지 ‘앙가주망’인지 구분하기 힘든 전문가가 창궐한다. 이에 들어맞는 여러 ‘교수님’ 얼굴이 떠오르지만 이름을 여기에 적지는 않겠다. 구색 맞추기 인용은 독자에게도 누가 될까 싶어 언제부턴가 나는 전문가 코멘트를 아예 쓰지 않는 경우가 늘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들’을 비난하려 함이 아니다. 외려 내공 깊은 전문가들이 얼굴을 드러내길 바라고, 그들이 경제 현안에도 관심을 보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최근 만난 한 대학교수에게 이런 얘기를 꺼냈더니, 다음과 같은 촌평을 내놨다. “경제학에 밝은 교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당장의 경제 현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고민하는 교수는 드물다고 보면 된다.” 대학이란 현실 세계를 탐구하고 문제점을 찾아내며 해법을 모색하는 공간이라는 교과서적 인식과 실제 학계 풍토는 거리가 한참 멀다는 뜻이다. 시선을 나라 밖으로 돌리면 이런 학계의 모습은 상아탑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나 전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 벤 버냉키 전 프린스턴대 교수, 올리비에 블랑샤르 전 매사추세츠 공대(MIT) 교수 등은 경제 현안이나 정책에 대한 견해를 자신의 블로그나 언론 매체에 분명히 드러낸다. 이들의 활동을 놓고 어디에서도 ‘정치권에 줄 대기’라거나 ‘(전문성이 결여된) 얄팍한 견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들 석학의 활동은 공론장을 풍성하게 하고 경제 정책가들을 자극하는 긍정적 효과를 내고 있다. 물론 “미국 사회에서도 공론장에의 적극 참여는 석학들만의 특권”(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위원)이라는 평도 있지만 코멘트 받으려 동분서주해야 하는 ‘기자’로선 부러운 풍경임에 틀림없다.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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