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2팀 기자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었다. 라디오에선 5호 태풍 ‘다나스’의 북상 소식이 들려왔지만, 금강 모래톱은 한여름의 열기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설레서 잠을 못 잤어.” 강을 마주한 그가 말했다. 평소 홀로 지켜오던 강에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하니, 아이처럼 달뜬 마음에 밤잠을 설친 것이다. 지난달 19일 충남 공주 금강 변 명승지인 고마나루에 나선 것은 그의 채근 때문이었다. “천주교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님이 금강을 찾는데, <한겨레>가 취재를 해야 하지 않아?” 이날은 천주교 주교회의 사제들과 성도 20여명이 금강을 찾기로 한 날이었다. 금강 3개 보의 수문을 연 뒤 일어난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평상시처럼, 그는 전날에도 강변 모래톱에 난 풀을 하나하나 뽑았다고 했다. “뙤약볕에 어지러워죽는 줄 알았어.” 그가 웃으며 말했다. 축구장 반만한 모래톱에서 혼자서 풀을 뽑는 모습이 선했다. ‘품이 든 아름다움이구나.’ 모래톱을 보며 생각했다. 김종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금강 요정’으로 불리는 이다. 그는 금강의 상처를 자기공명영상(MRI)처럼 알았다. 그를 따라 아마존 같은 풀숲을 지나면 버려진 수변 공원의 황폐함이 있었고, 그의 발꿈치를 좇아 강변 둔덕을 걷다 보면 죽은 물고기의 비참함이 펼쳐졌다. 그의 낡고 하얀 차에 올라 구불구불한 길 넘어 도착한 시골 마을엔 산처럼 쌓인 준설토에서 흙바람이 일었다. 길도 사람도 새도 없는 곳에 오직 강의 아픔이 있었다. 공주 지역 신문사 사장이던 그가 시민기자가 된 건 4대강 사업 때문이었다. 거의 모든 지역 언론이 4대강 사업 홍보비를 받아 홍보 기사를 쏟아낼 때, 그는 직접 목격한 강의 아픔을 감추지 않았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수입이 끊겼고, 신문사는 망했으며 가산은 바닥이 났다. 2012년 가을 수십만마리의 죽은 물고기가 금강 위로 떠올랐을 때, 열흘 넘게 참상을 오롯이 마주한 그는 매일 밤 가위에 눌렸다고 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강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망가지는 금강을 기록하고 알리는 일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4대강 사업 이후 거의 날마다 강의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빚을 내 마련한 투명카약과 드론, 무인카메라로 녹조가 창궐한 죽어가는 강의 모습과 보 개방 뒤 생명이 되살아나는 강의 모습을 담아냈다. 큰빗이끼벌레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확인하려 입에 넣고 삼키기까지 했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고 두통에 시달렸다. 지난 10년 동안 모든 것을 쏟아부어 기록한 수천건의 기사와 수많은 사진, 영상 등은 고스란히 4대강 사업의 참상과 재자연화의 희망을 알리는 가장 정확한 증거로 남았다. 4대강 사업으로 황폐해진 다른 강보다 금강에 관한 정보와 자료가 유독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달 <한겨레>가 기획 보도한 ‘산 강과 죽은 강’의 상편 ‘생명 돌아온 금강’ 기사의 자료 사진과 취재도 그에게 많은 부분에서 빚을 졌다. “금강에 저분이 계셔 정말 다행이에요.” 천주교 사제들이 금강을 찾은 그날, 이애령 예수수녀회 수녀가 맨발로 고마나루 모래톱을 걸으며 말했다. 4대강 사업 이후 강바닥에 쌓인 펄에서는 여전히 시궁창 냄새가 났다. 하얀 모래의 촉감과 악취 사이에서 수녀는 “멀리서 봤을 땐 아름다운 모래톱이지만, 가까이서 보니 강의 고통이 여전한 것 같다”고 했다. 이날 김 기자는 자신이 수년 동안 관찰해온 ‘위대한 강’에 대한 이야기를 천주교 사제와 성도들에게 오랫동안 들려주었다. 아픈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의 표정으로. 그 모습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프기도 해서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노력이 녹아 있는 금강은 보 개방 이후 모래톱이 살아나는 등 서서히 생명을 회복하고 있다. 금강에도 그에게도, 부디 신의 가호가 있기를. floye@hani.co.kr
칼럼 |
[한겨레 프리즘] 금강의 기록자, 김종술 / 최예린 |
전국2팀 기자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었다. 라디오에선 5호 태풍 ‘다나스’의 북상 소식이 들려왔지만, 금강 모래톱은 한여름의 열기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설레서 잠을 못 잤어.” 강을 마주한 그가 말했다. 평소 홀로 지켜오던 강에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하니, 아이처럼 달뜬 마음에 밤잠을 설친 것이다. 지난달 19일 충남 공주 금강 변 명승지인 고마나루에 나선 것은 그의 채근 때문이었다. “천주교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님이 금강을 찾는데, <한겨레>가 취재를 해야 하지 않아?” 이날은 천주교 주교회의 사제들과 성도 20여명이 금강을 찾기로 한 날이었다. 금강 3개 보의 수문을 연 뒤 일어난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평상시처럼, 그는 전날에도 강변 모래톱에 난 풀을 하나하나 뽑았다고 했다. “뙤약볕에 어지러워죽는 줄 알았어.” 그가 웃으며 말했다. 축구장 반만한 모래톱에서 혼자서 풀을 뽑는 모습이 선했다. ‘품이 든 아름다움이구나.’ 모래톱을 보며 생각했다. 김종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금강 요정’으로 불리는 이다. 그는 금강의 상처를 자기공명영상(MRI)처럼 알았다. 그를 따라 아마존 같은 풀숲을 지나면 버려진 수변 공원의 황폐함이 있었고, 그의 발꿈치를 좇아 강변 둔덕을 걷다 보면 죽은 물고기의 비참함이 펼쳐졌다. 그의 낡고 하얀 차에 올라 구불구불한 길 넘어 도착한 시골 마을엔 산처럼 쌓인 준설토에서 흙바람이 일었다. 길도 사람도 새도 없는 곳에 오직 강의 아픔이 있었다. 공주 지역 신문사 사장이던 그가 시민기자가 된 건 4대강 사업 때문이었다. 거의 모든 지역 언론이 4대강 사업 홍보비를 받아 홍보 기사를 쏟아낼 때, 그는 직접 목격한 강의 아픔을 감추지 않았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수입이 끊겼고, 신문사는 망했으며 가산은 바닥이 났다. 2012년 가을 수십만마리의 죽은 물고기가 금강 위로 떠올랐을 때, 열흘 넘게 참상을 오롯이 마주한 그는 매일 밤 가위에 눌렸다고 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강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망가지는 금강을 기록하고 알리는 일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4대강 사업 이후 거의 날마다 강의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빚을 내 마련한 투명카약과 드론, 무인카메라로 녹조가 창궐한 죽어가는 강의 모습과 보 개방 뒤 생명이 되살아나는 강의 모습을 담아냈다. 큰빗이끼벌레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확인하려 입에 넣고 삼키기까지 했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고 두통에 시달렸다. 지난 10년 동안 모든 것을 쏟아부어 기록한 수천건의 기사와 수많은 사진, 영상 등은 고스란히 4대강 사업의 참상과 재자연화의 희망을 알리는 가장 정확한 증거로 남았다. 4대강 사업으로 황폐해진 다른 강보다 금강에 관한 정보와 자료가 유독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달 <한겨레>가 기획 보도한 ‘산 강과 죽은 강’의 상편 ‘생명 돌아온 금강’ 기사의 자료 사진과 취재도 그에게 많은 부분에서 빚을 졌다. “금강에 저분이 계셔 정말 다행이에요.” 천주교 사제들이 금강을 찾은 그날, 이애령 예수수녀회 수녀가 맨발로 고마나루 모래톱을 걸으며 말했다. 4대강 사업 이후 강바닥에 쌓인 펄에서는 여전히 시궁창 냄새가 났다. 하얀 모래의 촉감과 악취 사이에서 수녀는 “멀리서 봤을 땐 아름다운 모래톱이지만, 가까이서 보니 강의 고통이 여전한 것 같다”고 했다. 이날 김 기자는 자신이 수년 동안 관찰해온 ‘위대한 강’에 대한 이야기를 천주교 사제와 성도들에게 오랫동안 들려주었다. 아픈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의 표정으로. 그 모습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프기도 해서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노력이 녹아 있는 금강은 보 개방 이후 모래톱이 살아나는 등 서서히 생명을 회복하고 있다. 금강에도 그에게도, 부디 신의 가호가 있기를. floy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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