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0.01 17:46
수정 : 2017.10.01 20:42
박병수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2년 전 성사된 9·19 공동성명의 기본 아이디어는 서로 원하는 보따리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맞바꾸자는 것이다. 그래서 6자회담에 참여한 한국과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5개 나라가 북한에 경제지원과 안보를 보장하고 그 대가로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한다는 원칙에 합의하게 됐다. 그러나 서로 원하는 것을 맞교환하는 이런 협상 방식은 이제 잘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우선 북한이 ‘핵 포기’ 보따리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과거 “조선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되뇌던 목소리는, 핵 억제력은 “흥정물이 아니고” “정당한 자위”며 “포기할 수 없다”로 바뀌었다.
이렇게 태도가 바뀐 데는 이제 서로 내놓는 협상 보따리의 평가액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북한이 2000년대 초·중반 6자회담에 나온 배경에는 어려운 경제 사정이 있다. 북한 경제는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붕괴로 고립무원에 빠진 뒤 곧바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붕괴하다시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햇볕정책을 표방하며 손을 내밀었고, 북-미 협상을 주선하고 나서자 뿌리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외부의 경제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북한 경제는 유엔 등 국제사회의 잇따른 제재에도 불구하고 그런 참담한 상황이 아닌 것 같다. 한국은행 추계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3.9%에 이르는 등 비교적 양호해 보인다. 지난 4월엔 평양의 초호화 신시가지인 여명거리 완공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는 등 성취를 자랑했다. 이제 외부의 경제지원 약속을 핵하고 바꿔야 할 만큼 절실하지 않게 된 것이다.
북한의 태도 변화는 얼추 김정은 집권 시기와 겹친다.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듬해인 2012년 4월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에 ‘핵보유국’이라고 명시했고, 2013년 3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경제·핵무력 병진 노선’을 채택했다.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식화한 것이다. 북한은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 출범 때만 해도 남한의 경제지원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여러 차례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했고, 2009년 10월 임태희-김양건의 싱가포르 비밀 회동, 2011년 5월 베이징 비밀 실무접촉 등도 이어졌다. 북한은 2013년 2월 박근혜 정부 출범 초반까지도 대화 공세를 완전히 접진 않았지만 이후 의지나 강도 면에서 갈수록 퇴색하는 모습이었다.
유엔의 대북제재는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강도와 횟수에 비례해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다. 지난달 9번째 대북제재에선 처음으로 유류 수출도 제재 대상이 됐다. 북한 경제를 옥죄어 김정은의 태도를 바꾸게 하겠다는 시도가 경제지원·안보 제공과 핵무기 포기를 교환한 과거 6자회담의 환경을 복원하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여기엔 북한 대외무역의 90%를 차지하는 중국만 제재에 적극 나서게 되면 성사될 것이란 기대도 있다. 그러나 성패는 차치하고라도 그 과정에서 불가피할 한반도의 긴장 고조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벌써부터 한반도 정세가 격화되면서 남한은 보이지 않는다. 북-미 대결 구도가 도드라지면서 군사적 옵션만 크게 주목받고 있다.
북한 경제가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식량은 부족하고 빈곤이 만연해 있다. 그래도 북한을 경제지원이나 경협 약속만으로 대화 테이블에 나오도록 하는 건 과거보다 힘들어진 것 같다. 한반도의 화해와 공존, 대화를 위한 새로운 틀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된 게 아닐까 싶다.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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