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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7.04 18:28 수정 : 2017.07.05 09:07

석진환

법조팀장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 5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 출석을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구치감으로 향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김기춘은 살아온 인생 전체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오직 블랙리스트 하나로만 처벌받는 건가요?’

인터넷 검색을 하다 한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질문을 봤다. 중학생 아들이 물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어쩌면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 전체를 심판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착하게’ 말해줬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3일 열린 블랙리스트 사건 결심공판을 지켜본 뒤엔 착한 척하는 게 나쁜 짓이 아닐까 생각했다. 김기춘은 내 순진한 생각과 달리 최후진술에서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고 심판을 청했다. “45년간 공직자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청백리로서,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살았다”, “혁명적인 특검에 억울하게 구속됐고, 그 자체로 고위공직자와 지도자의 삶을 살아온 이에게는 참혹한 형벌이다. (삶이) 1~2년 남은 중병 노인에게 무슨 형벌이 필요한가?”

공개된 법정에서 그가 국민과 재판부를 향해 조롱과 훈계를 하는 대목에선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변호인을 통해 “미국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이런 문제가 있다. 1)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다. 2)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어느 것이 사실인가?”라는 문제를 냈다. 그러면서 “우리 국민은 사실과 의견의 구별에 익숙하지 않아 의견을 많이 모아 만들면 진실인 줄 알고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는 막말을 해댔다. 국민의 수준을 미국 5학년 초등생만큼도 생각하지 않으니, 자신이 2인자로 수렴청정했던 정부가 임기도 못 채우고 문을 닫았다는 걸 그는 아직도 모른다.

그가 재판에서 ‘인생’을 내걸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45년 청백리’라는 그는 무슨 일을 했나. 중앙정보부 대공수사부장과 서울지검 공안부장, 검찰총장을 지내며 평생의 업으로 삼은 ‘종북좌파 딱지 붙이기’야말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칼질이었다. 그가 지휘한 간첩단 사건은 법원 재심에서 증거조작과 고문으로 줄줄이 무죄가 나고 있다. 그는 여태 사과 한 번 하지 않았다. ‘빨갱이’로 몰려 처참하게 인생이 망가진 이와 그들 가족의 수많은 인생 앞에서 김기춘은 ‘45년 지도자로 살아온’ 인생이 망가졌다고 푸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변호인이 최후변론에서 판사를 향해 “정치권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과 용기를 지킨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과 김홍섭 판사님을 상기하고자 한다”고 ‘촉구’하는 대목에선 내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두 사람은 권력의 부당한 압력에 저항해 ‘법의 정신’을 지키려고 평생 힘없는 이들을 위해 산 법조계 스승이다. 평생을 양지에 머물렀던 원조 ‘법비’(법을 이용하는 도적)이자 ‘법꾸라지’가 인용할 인물이 아니다.

그는 재판 중에 이런 말도 했다. “망한 왕조의 도승지를 했으면 사약을 받지 않겠느냐. 재판할 것도 없이 사약을 받으라면 깨끗이 마시고 끝내고 싶다.” 자포자기로 들리지만, 실은 자신은 법적인 책임은 없고 오로지 정치적 책임만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활약했던 왕조(독재)시대도 아니고, 그가 충성했던 왕(독재자)도 없으며, 그에게 내릴 사약 같은 면죄부 따윈 더더욱 없다.

오는 27일, 그는 정치적 책임이 아닌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후 세상은 그의 행적을 되짚으며 역사적 심판을 할 것이다. 그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인생 마지막 법정에 선 것은, 종북좌파 때려잡기에 바친 인생에 대한 ‘일말’의 심판이라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 법정에서 본 환자복 차림의 김기춘은 초췌했고,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가냘프고 메말라 보였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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