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6.06 21:10
수정 : 2017.06.06 22:15
석진환
법조팀장
‘슈퍼맨과 배트맨’, ‘김두한과 시라소니’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았던 어린 시절 탓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내 몸 어딘가에 누가 더 힘이 센지를 살피는 ‘무의식적 저울질 유전자’가 있는 것 같다. 폭력이 난무했던 교실에서 작은 키로도 ‘따’ 당하지 않으려다 보니, 이 독특한 유전자는 점점 더 내 안에 깊숙이 착근하지 않았을까 싶다.
‘뇌물을 주는 쪽과 받는 쪽, 누가 더 힘이 센가?’ 기자가 되어 ‘뇌물 사건’을 접할 때마다 나는 또 기사와 상관없이 쓸데없는 질문을 떠올리곤 했다. 언제부턴가 뇌물 주는 집단이 받는 공권력보다 우위에 있는 게 일상화되어 그런 듯하다.
저울질을 좋아했지만, ‘시장권력(재벌)이 정치권력을 압도한다’는 식의 추상적 진단엔 별 감흥이 없었다. 2009년 그 장면을 보기 전까진 그랬다. 그해 4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됐고, 검찰은 “아내가 받은 돈을 남편이 모를 수 있느냐”고 압박했다. 그때 검찰에 출입했던 나는 정확히 1년 전인 2008년 4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불법 경영권 승계 혐의로 특검에 소환돼 포토라인에 섰던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때 특검은 “아들이 한 일을 아버지가 모를 수 있느냐”, “마름(사장단)이 한 일을 주인이 모를 수 있느냐”고 물어봤을까.
같은 질문 앞에 선 두 사람은 어떻게 됐나. 노 전 대통령 소환 한 달 뒤인 5월29일 판가름이 났다. 저울질 따윈 필요 없었다. 그날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치러졌고, 역시 그날 대법원은 경영권 불법승계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삼성으로 상징되는 ‘재벌권력’의 우위와 공권력의 ‘굴종’은 워낙 은밀해 두 눈으로 확인할 기회가 흔치 않다. 그 뒤로 8년 만에 국정농단 사건 재판에서 그런 ‘반갑지 않은’ 기회를 만나고 있다.
‘힘센 삼성’은 재판이 거듭될수록 너무나 분명한 현실로 확인되고 있다. 삼성 사장이 온 나라 공무원의 감사를 총괄하는 감사원 사무총장 후보자를 ‘또××’라고 품평하며 반대하는 녹음파일이 법정에 울려 퍼졌을 때는, 공무원들이 앞으로 감사를 거부하면 어쩌나 하는 ‘헛된’ 걱정마저 했다.
지난주엔 대한민국 ‘경제검찰’이라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어떻게 삼성에 무릎을 꿇었는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처분해야 할 주식을 1천만주에서 500만주로 통 크게 깎아줬다. 공정위 부위원장은 삼성 사장에게 실시간으로 상황을 알리며, ‘아이디어’까지 친절하게 제공했다. 위원장은 재판에서 “나는 그 분야 비전문가”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반값 할인’ 과정 내내 공정위와 통화했던 청와대 비서관은 “소신대로 하라 했을 뿐”이라고 잡아뗐다. 그리고 마침내 공정위 부위원장 출신의 김앤장 고문이 삼성을 대리해 ‘친정’을 설득하는 대목에서, 현직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왜 그랬는지 의문이 풀렸다. 청와대의 압박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전관예우의 유혹’에 ‘소신’을 꺾은 것이기도 하다.
정작 공무원의 ‘소신’을 붙들고 있었던 이들은 따로 있었다. 청와대와 위원장, 부위원장의 부당한 지시를 반대했던 공정위 직원들이 이를 모조리 기록으로 남겼고, 덕분에 지금 우리는 삼성과 공정위의 민낯을 보고 있다.
그래서 다시 ‘저울질’을 해본다. ‘유혹’과 ‘소신’ 중 뭐가 더 셀까. 시간이 가고 직급이 높아지면 소신을 지켰던 공무원들도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리지 않을까. 세금을 내는 한 사람으로서, 그 소신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응원한다. ‘삼성’과 ‘유혹’만이 줄기차게 이기는 세상이라니….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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