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4.11 18:30
수정 : 2017.04.11 20:49
석진환
법조팀장
그때 입사 4년차였다. 이제 막 법조계 취재를 맡게 된 터라 안면이 있던 판사와 술잔을 놓고 마주 앉았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법조타운 골목엔 검사와 판사가 가는 술집이 따로 있을 만큼 두 부류의 사이가 좋지 않던 때였다. 푸념하듯 그가 말했다.
“판사들은 힘없어. 권력은 검사한테 있지. 왜냐? 판사는 내 앞에 차려진 밥상(사건) 앞에서만 판사야. 근데 검사는 전국에 널린 재료로 밥상 차리잖아. 그래서 검사는 어디 가도 검사야.”
내가 “언제든 미운 놈 나쁜 놈 찾아내 탈탈 털어 혼내줄 수 있다는 거죠”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가 한심하다는 듯 한마디를 보탰다. “힘은 벌주는 데서 나오지 않지. 검찰의 진짜 힘은 봐주는 것, 덮어주는 데서 나오는 걸 아직 모르네.”
뒤통수를 한 대 갈겨 맞은 기분이었다. 이후로 나는 그 밥상 이야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장면을 수없이 보게 됐다. 판사들이 힘없다는 엄살도 안 믿게 됐지만, 봐줘가며 권력을 지키는 검찰도 참 안 바뀐다는 생각을 곱씹었다.
미네르바 사건, 용산참사 수사, 광우병 ‘피디(PD)수첩’, 그동안 검찰이 엉뚱하게 칼을 휘두른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검찰은 언제나 감추고, 뭉개고, 봐줬던 사건에서 추락했다. 날 선 칼을 가지려고, 정작 베어야 할 곳을 베지 않는 칼잡이들이라니….
멀리 갈 것도 없다.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를 독려했던 채동욱 총장 낙마 뒤 수사는 흐지부지 끝났다. 그 뒤 검찰은 내내 내리막이었다. 세월호 사건도 청와대 눈치나 보며 유병언만 잡으러 다니다 세월 다 보냈다. 이후 검찰을 장악한 김기춘, 황교안, 우병우의 주문은 내내 ‘하지 말라’였다.
압권은 2년 전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 수사였다. 당시 <한겨레> 취재팀의 메모에 이런 게 있다. “승마협회 그거, 정윤회 부인 쪽이다”, “최순실이 청와대 무시로 드나들었다는 거잖아.” 당시 검찰 수사팀에서 흘러나온 말들이다. 검찰은 농단의 실체를 눈치챘지만, 박 대통령 주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검찰 권력서열 2위인 서울중앙지검장으로서 그 수사를 지휘했던 이는 김수남 현 검찰총장이다. 그때 제대로 했다면 총장은 못 됐겠지만,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을 구속하는 짓궂은 운명은 피했을 것이다. 국민도 이렇게 허망한 배신감에 치를 떨진 않았을 거다.
검찰이 당당하게 면죄부를 발행하는 특허를 유지하고 있는 건 독차지한 권한이 많아서다. 그 특허의 핵심 원천기술은 다름 아닌 기소독점권, 영장청구를 포함한 수사지휘와 종결권 등이다. 식재료 선택부터 밥상 차릴 권한, 또 밥상을 차리지 않을 권한까지 한 조직이 쥐고 있으니, 국민이 제대로 된 밥상을 받을 리 없다.
오랜 기억을 끄집어낸 건, 바야흐로 다시 검찰개혁을 둘러싼 길고 험난한 싸움판이 열리고 있어서다. 주요 대선 후보가 예외 없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신설과 검·경 수사권 조정 등 검찰의 독점적 권한을 해소하겠단다. 그러나 누가 되든 쉽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도 그랬다. 공수처와 수사권 조정을 추진했지만, 검찰과 국회·언론 등 기득권의 강력한 저항을 넘지 못했다.
두고 보시라. 이제 본게임이 시작되면 ‘공수처가 또 다른 무소불위 권력이 된다’, ‘수사 능력이 없고 부패한 경찰 때문에 인권침해만 늘어난다’ 등 온갖 논리가 검찰을 감싸고돌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잊지 마시라. 우리 아니면 안 된다는 엘리트 검찰의 오만과, 그들을 이용했던 권력이 국민 밥상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놨다는 것을.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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