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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31 18:13 수정 : 2017.01.31 18:50

허호준
호남제주팀장

설 연휴인 지난 30일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을 찾았다. 제주해군기지 주변에 내걸린 ‘해군기지 없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결사반대’, ‘구상권을 철회하라’ 등이 적힌 색이 바래고 해진 노란 깃발들이 세찬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검푸른 바다의 거친 파도가 쉴 새 없이 강정포구를 때렸다.

지금, 강정마을 주민들은 국가에 대한 분노와 체념이 뒤섞여 있다. 강정마을회 부회장 겸 해군기지 반대대책위원장 고권일씨를 만났다. 그는 기자와 고등학교 같은 반 동창생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 그는 늘 진지했고 낙관적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원 다닐 무렵 월간지와 스포츠신문에 정기 연재를 할 정도로 잘나가는 만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2008년 2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뒤 투쟁의 맨 앞 대열에 섰다. 고향의 상황은 가만있게 내버려두질 않았다.

투쟁 현장에서 만난 구릿빛 얼굴의 그는 10대 후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온순하고 합리적인 성품은 여전했다. 대학 시절 향수병을 앓다 고향에 달려와 구럼비 바위를 거닐고 낚시를 하면서 심신을 치유했다고 한다.

올해로 강정 주민들의 해군기지 반대투쟁이 만 10년을 맞았다. 2007년 4월 일부 주민들의 일방적 기지 유치 결정에 따른 대다수 주민 반발로 시작된 반대투쟁이 이처럼 오래가리라고 생각한 이는 드물다.

강정 주민들의 오랜 투쟁에도 지난해 2월 ‘해군 제주기지’는 준공됐다. 하지만 건설 과정에서 남겨진 주민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물론 재산적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다. 연인원 700여명이 경찰에 끌려갔고, 재판에 회부된 건수만 392건에 이른다. 벌금액은 4억여원에 이른다. 해군기지는 마을의 모습을 바꿔놓았고, 주민들을 갈등 속으로 빠뜨렸다.

준공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지역사회와 상생하고 화합하는 뜻깊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해군은 삼성물산이 공사 지연에 따른 손실배상금을 요구하자 273억원을 물어주고 준공식 한달 만에 주민과 마을회 등 개인 116명과 단체 5곳을 상대로 34억5천만원의 구상권 청구로 주민들의 뒤통수를 쳤다. 이와 별도로 삼성물산과 대림산업이 수백억원의 배상금을 해군에 요구해 절차를 밟고 있다.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커다란 생채기를 낸 정부는 갈등 해소는커녕 주민들의 분노를 더욱 키우고 있다. 여야 국회의원 165명이 지난해 10월 “정부가 국민과의 소송을 통해 주권자인 국민을 고통의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구상권 철회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냈다. 원희룡 제주지사와 제주도의회는 물론 제주지방변호사회까지 나서 구상권 철회를 건의·요구했지만, 정부의 태도는 요지부동이다. “국책사업에 반대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라”고 국민에게 ‘경고’하는 듯하다.

정부가 주민들에게 수십억원의 구상권을 청구한 사례는 없다. 지난달 23일 열린 강정마을총회에서 주민들은 “이게 국가냐”며 분노했다. 주민들은 구상권을 아픈 사람의 고혈을 짜내는 ‘피고름’이라고 했다. 고씨는 “국책사업이면 주민의 목소리는 짓밟아도 되느냐.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싸워온 주민들이 많은 불이익을 받았는데 구상금까지 물어야 하는 것은 국가폭력”이라고 분노했다. 주민들은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 70여년 전 4·3으로 이미 국가폭력을 경험한 이들의 트라우마를 들춰내서는 안 된다. 강정 주민들을 끌어안지 않고는 상생이나 화합이라는 말은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은 강정 주민들의 피고름을 닦아줘야 한다.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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