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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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대
지역부문 선임기자
2001년 2월19일 영국 잉글랜드 남동부 에식스 지방의 한 도축장. 대기하던 돼지의 입과 발에서 구제역 의심 증상이 나타났다. 바이러스 검사는 이튿날 오전 10시에야 시작됐다. 꼬박 하루가 지체됐다. 그날 오후 1시에 양성 판정이 나왔지만, 영국의 농식품부는 또 사흘을 보냈다. 이동제한 조처를 내린 것은 23일 오후 5시였다. 의심 신고 뒤 나흘하고 한나절이 흘러간 뒤였다. 이동중인 가축에 대해서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통제하지 않았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초동대응 실패였다. 의회 조사에서는 사흘 전인 20일에만 이동제한을 했더라도 구제역 피해를 최대 절반까지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바이러스가 퍼진 뒤에도 정부 대응은 여전히 안이했다. 한달이 지난 3월19일에야 군병력을 살처분 현장에 투입했다.
그 대가는 사상 최악의 구제역 재앙이었다. 7개월 동안 살처분된 가축이 645만6000마리, 가축을 잃은 농장이 1만167곳, 정부 보상금과 방역비 등이 5조1000억원(28억파운드), 농업생산 피해액 1조6000억원(9억파운드), 관광부문의 직접손실액 5조4000억원(30억파운드)이었다.
초동대응 실패→범정부 차원의 안이한 대응→백신접종 오판→최대의 재앙으로 이어진 2001년 영국 정부의 실패는 10년 뒤 한국에서 판박이로 재연되고 있다. 우리의 전체 피해 규모가 영국보다 조금 작다고 자위할 일은 아니다. 매몰지의 2차 환경피해가 얼마나 더 불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떤 정부도 실패는 하기 마련이다. 실패에서 더 큰 것을 배우는 정부와 그렇지 않은 정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영국 정부는 구제역이 잡혀가던 2001년 6월 농식품부(MAFF)를 환경식품농촌부(DEFRA)로 개편하고, 구제역의 성찰을 논의하는 3개의 위원회를 설치했다. 구제역 사태의 교훈과 방역대책을 검토하는 2개의 조사위원회에 더해, 경제·환경·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 ‘농업과 식품의 미래’를 연구하는 정책위원회까지 가동했다. 그래서 농업이 소비자에게 가까이 다가갈 것을 요구하고, 수질·공기·토양·생물다양성·농촌경관 등의 친환경을 강화하고, 동물복지와 건강한 농촌경제를 강조하는, 명료한 환경농업 정책의 틀을 수립했다.
우리 정부도 밀식사육을 억제하고 환경과 동물복지를 강화하는 축산정책의 줄거리는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정권 차원의 의지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구제역 예산을 농업 쪽에서 결자해지하라’는 식의 단세포적인 횡포를 일삼고 있다. 쪼그라든 농업예산에서 최대 1조원을 줄여 구제역 비용으로 충당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농업예산은 퍼주기이고 농산물은 언제라도 싼값에 수입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탓이다. 애그플레이션은 닥쳤는데 식량안보 강화를 위한 긴 안목의 투자는 실종됐다.
지금 정부의 시장만능주의는 농업을 ‘국내총생산(GDP)의 2%’라는 돈의 무게로만 취급해왔다. 그러다가 쇠고기 촛불파동으로 집권 초기 화를 자초했고, 이제 구제역 재앙은 레임덕으로 가는 길을 트고 있다. ‘내가 해보지 않은 일’이라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기가 참 어려운 모양이다.
“정부가 앞장서고 국민이 따라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구제역 사태의 정부 실책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영국의 ‘구제역 교훈 조사위원회’는 보고서 서문에서 정부의 솔직한 반성이 농민 신뢰를 회복해 새로운 비전을 세울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답은 언제나 쉽고 단순하다. 실행이 어려울 뿐이다.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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