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2.08 19:03
수정 : 2011.02.09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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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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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80년 아테네의 사절들이 델포이 신전을 찾아간 것은 페르시아 대군이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침략군이 해협의 부교를 7일 밤낮 동안 건너 그리스 땅으로 진격했다. 아테네는 제국의 밥이 되고 말 것인가. 무녀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아폴론의 신탁을 받을 때 아테네 사절들도 몸을 떨었을 것이다. “제우스께서 나무 성벽을 주실 것인즉, 이 나무 성벽이 너희를 도와주리라.” 사절단이 그 모호한 신탁을 들고 돌아오자 아테네 지휘부는 둘로 갈렸다. 도대체 ‘나무 성벽’이 뭐란 말인가.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둘러친 가시나무 담장을 뜻한다는 주장에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나무 성벽이란 목재 함선을 가리킨다고 맞섰다. 지휘부는 민회를 소집했다. 나라의 운명이 결정될 상황이었다. 시민들이 테미스토클레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테네는 살라미스섬 앞바다에 200척의 전함을 띄워 페르시아 대군을 격파했다. 가장 건강했을 때의 아테네 민주주의는 신탁조차 직접민주주의 방식으로 확정했고, 그 결정으로 나라를 구했다.
두 세대 뒤인 기원전 427년 봄 아테네는 레스보스섬의 미틸레네를 두고 다시 민회를 열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그리스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틸레네는 힘의 이완을 틈타 반란을 꾀했다. 아테네는 함대를 급파해 미틸레네의 무릎을 꿇렸다. 긴 전쟁에 시달린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었다. 과격파 클레온이 미틸레네 성인 남자 1만명을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팔자고 선동했다. 민회는 전례없이 가혹한 발의에 휩쓸렸고, 삼단노선 한 척을 즉시 파견해 결정을 실행하라고 명령했다. 다행히 분노에 눌려 있던 이성이 되살아났다. 이튿날 열린 특별 민회에서 시민들은 전날의 의결을 철회했다. 1차 명령문을 싣고 하루 전에 떠난 배를 따라잡으려고 두 번째 배가 미틸레네를 향해 쉬지 않고 노를 저었다. 명령문이 낭독될 때 두 번째 배가 도착했다. 집행은 중지됐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균형감은 아직 살아 있었다.
10년 뒤에는 이 균형감마저 사라졌다. 에게해 남쪽 조그만 섬 멜로스가 말을 듣지 않자 아테네는 기원전 416년 전함 30척을 보내 최후통첩을 던졌다. “약육강식은 자연의 법칙이며 이 법칙을 따르는 것이 정의다.” 멜로스인들이 그 ‘정의’를 거부하자 아테네 군대가 섬을 포위했다. 여름에 시작된 봉쇄는 겨울까지 이어졌다. 멜로스는 굶주림과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다. 아테네 민회는 멜로스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부녀자들을 노예로 팔기로 결의했다. 아테네 군대는 섬을 초토화했다. 세 사건에서 아테네는 모두 민회라는 직접민주주의의 장을 통해 행동을 결정했다. 그러나 결과는 아주 달랐다. 첫째 경우가 민주주의의 막강한 잠재력을 보여주었다면, 둘째 경우는 제국주의의 비이성에 감염됐고, 마지막의 경우는 광기의 종족학살로 끝나고 말았다.
민주주의의 형식을 갖추었다고 해서 다 같은 민주주의가 아님은 재론할 것도 없다.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가 이명박 정부 3년을 돌아보며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았으며, 정상적으로 작동했다”(<프레시안> 새해 인터뷰)고 한 것은 선거를 통한 집권이라는 민주주의의 최소 형식을 판단 준거로 삼은 평가다. 그런 식의 논리에서 한발만 더 나아가면, 유신체제는 ‘한국적 민주주의’가 되고 히틀러 독재는 ‘총통 민주주의’가 되고 만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민주주의는 어느 시점에 후퇴하기 시작했으며 결국에는 폴리스의 몰락과 민주주의 사망으로 이어졌다. 내용 없는 민주주의는 죽은 민주주의다.
고명섭 책·지성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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