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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2.21 21:13 수정 : 2010.12.21 21:13

고명섭 책·지성팀장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1차 세계대전 격전장이었던 동부전선 최전방, 총탄이 핑핑 날아가는 초소에서 낡은 공책에 명제들을 써나갔다. 그 공책의 명제들이 묶여, 현대 철학의 방향을 언어탐구로 전환시킨 결정적 저작 <논리철학 논고>가 됐다. 오스트리아 최대 철강재벌 집안 막내아들이었던 비트겐슈타인에게 재산은 짐이었다. 그는 막대한 유산을 단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기부하고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높은 산에 올라갈 때는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출발해야 한다.” 짐을 벗은 비트겐슈타인은 교사자격증을 따 수도 빈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 오지의 초등학교 선생이 됐다. 1922년 전장에서 쓴 그 원고가 출간됐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학계에서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 빈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그 경이로운 책의 저자가 과연 실존하는 인물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모교 케임브리지대학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산골에서 코흘리개 아이들을 가르치던 6년 동안 그의 명성은 모교를 뒤덮었고,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 철학 천재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1929년 마침내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에 돌아왔을 때 케인스는 이렇게 말했다. “5시15분 기차로 신이 도착했다.” 이때부터 비트겐슈타인 철학 인생의 두 번째 국면이 시작됐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대표할 단 한 권의 책을 쓰느라 그는 이후 20년의 세월을 바쳤다. 어느 날 그는 <철학적 탐구>라고 불리게 될 그 원고를 쓰다 말고 자문했다. “먼저 괜찮은 인간이 되지 않고 어떻게 훌륭한 논리학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동안 저지른 죄를 참회하지 않으면 참된 철학을 세울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이제껏 저지른 모든 과오와 범죄를 낱낱이 기록해 가족과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고백했다.

이를테면 이런 과오였다. 1차 대전 중에 비트겐슈타인은 상관한테서 위태로운 다리를 건너 폭탄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두려움 때문에 몇 번을 물러섰다가 결국 다리를 건넜으나, 그 처음의 비겁을 그는 과오로 여겼다. 공정하게 이야기하면 비트겐슈타인은 군인정신이 투철한 사람에 속했다. 자원입대해 무공훈장을 받고 장교로 승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작은 잘못을 잊지 못했다. 더 부끄러운 잘못은 초등학교 교사 시절 저질렀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자상한 선생이 되고 싶었던 이 초임 교사는 불같이 화를 내는 무서운 선생이 되고 말았다. 두뇌 계발에 좋다고 확신해 가난한 벽촌의 아이들에게 매일 두 시간씩 수학을 가르쳤으나 아이들이 따라오지 못하면 뺨을 때리고 머리를 잡아챘다. 그러다 머리를 맞은 아이가 실신하고 말았다. 놀란 비트겐슈타인은 그날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명백한 도덕적 실패였다. 10년 만에 그는 그때의 아이들을 찾아가 일일이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 어떤 사람은 선선히 받아들였지만 어떤 사람은 냉담하게 거절했다. 그는 자기 내부의 파렴치를 씻어내려 마지막 한 점의 자부심까지 내던졌다.

평균치의 윤리적 감각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 범인들이 보기에 비트겐슈타인의 행동은 확실히 극단적이다. 결벽증의 임상사례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극단적 행위에 담긴 윤리적 엄격성이 환기시키는 힘은 자못 크다. 이 나라 정치의 파렴치에 질릴 때면 ‘깨끗한 마음 없이 깨끗한 철학 없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신념이 떠오른다. 형님예산이니 뭐니 하는 노골적인 사익추구의 저열한 정치는 저열한 윤리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군사적 긴장과 포연에도 그 저열함은 감춰지지 않는다.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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