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형석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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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의 문화 전성기에는 위대한 예술가와 더불어 사려 깊은 권력이 있었다. 이 땅에서 그 본보기로 흔히 떠올리는 이가 15세기 조선의 안평대군이다. 세종의 치세기 문화 황금기의 주역이었던 그는 수양대군과 권력투쟁을 벌이는 냉혹한 정객이었지만 1만권 넘는 장서와 200점 넘는 고금 중국의 서화들을 모은 수장가였고, 외유내강의 기품이 철철 넘치는 송설체 서예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서울 부암동 계곡에 지은 무계정사에는 신숙주, 박팽년 등 훈민정음을 만든 집현전 학자와 대화가 안견, 음악가 박연 등이 드나들었다. 그들의 재기가 고금 서화에 통달한 안평대군의 안목과 어우러져 숱한 시서화 걸작들을 빚어냈으니, 지난해 10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서 7만 인파를 움직였던 <몽유도원도>도 이렇게 탄생했다. 복숭아꽃 흐드러진 도원경에서 박팽년과 노니는 꿈의 정경을 사흘 만에 안견이 그림으로 완성하고, 안평대군의 발문과 21명 시인 묵객들의 찬시가 붙은 인류 예술사의 걸작을 만들었다. ‘훗날 이 그림 보는 자가 옛 그림 구해 내 꿈과 비교한다면 반드시 가부의 말이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뱉은 서문처럼, 현실세계의 자연미와 괴기스런 이상향의 환상세계가 갈마드는 <몽유도원도>의 창작 과정은 앞으로도 싱그러운 불가사의로 남을 것이다. 한나절 꿈이 우리 미술사의 영원한 성취로 영근 데는 권력과 문화의 행복한 만남이 있었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도시국가 피렌체의 메디치가도 기억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후원했던 로렌초(1463~1503)를 비롯해 코시모 1세, 프란체스코 등 메디치가 통치자들에게는 작가들을 우대하고 우아한 인연을 맺는 ‘문화력’이 통치를 지탱하는 주된 요건이었다. 가문은 18세기 몰락했지만, 최후의 후계자 안나 마리아는 가문의 예술품 전체를 모두 기증하는 조건으로 절대 피렌체를 벗어나게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예술과 교양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권력의 결단으로 피렌체 명화들은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그들과 달리 지금 우리 문화판의 최고 권력인 문화체육관광부 장차관은 역대 문화부 어느 시절에도 없던 야멸친 인신조롱을 받고 있다. 산하 기관장 코드 적출 논란에 문화예술위의 한 지붕 두 위원장 사태, 영화진흥위원회의 위탁사업 논란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딴따라 출신’이란 모멸적 언사나 천기를 못 숨긴다는 극단적 비난이 문화판에서 예사말처럼 튀어나온다. 지금 그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없다. 김정헌 문화예술위원장의 무리한 해임에 대한 법원의 취소 판결과 이에 따른 두 위원장 사태에 대해 장관은 유감 표명 대신 ‘재미있겠는데…’라고 했고, 1차관은 “서로 자기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좋다” “크게는 탐욕과 탐욕의 충돌 아니냐”는 선문답을 내놓았다. 장관은 지난해 한국예술종합학교 감사 파문 당시 항의시위하는 학부모 앞에서 ‘세뇌됐다’는 말도 꺼냈었다. 1990년 출범 이래 문화부 관료들은 최소한 문화계 전문가들을 어려워하려는 태도는 지켜왔다. 이 정권에서는 그런 예의가 송두리째 무너졌다. 2005년 문화계가 자율로 정책을 입안하라고 만든 문화예술위는 정부 지침을 시달받아 불법시위 불참 확인서를 숙제처럼 내야 예술인들에게 돈을 준다고 최근 ‘통첩’했다. 인문학자 슈바니츠가 명저 <교양>에서 “상호이해를 즐겁게 해주는 의사소통 양식”이라고 했던 교양의 실체를 지금 문화부 수장은 생생한 반면교사로 실연중이다. 조롱을 조롱박처럼 달고 사는 이 정권의 문화부는 가장 교양 없는 권력으로 기억될 것이다.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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