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2.11 22:05
수정 : 2010.02.11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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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금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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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퍼뜨리려거든 자본을 퍼뜨려라.”
미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는 1999년 영국의 한 잡지에 보낸 기고문의 첫머리를 이렇게 장식했다. 요지는 명쾌했다. 일정한 나이(18살)에 이른 모든 청년에게 나라가 5만파운드씩 돈을 나눠주자는 것.
형식은 조금 다르지만 영국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블레어 정부는 2001년부터 아동신탁기금(CTF)이라는 제도를 처음 도입했다. ‘베이비본드’라고도 하는 이 제도는,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에게 나라에서 250파운드를 통장에 넣어주는 것이다. 통장에 쌓인 돈은 원칙적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는 찾아 쓸 수 없고, 용도 역시 교육이나 주택구입 등으로만 제한된다.
풍족한 별천지 세상의 에피소드처럼 보일지는 모르나, 이런 흐름의 뿌리는 깊고도 넓다. 그 끝엔 이른바 ‘사회적 지분(stakeholder) 사회’라는 새로운 물줄기가 잇닿아 있다. 사회 구성원이면 누구나 그 사회를 유지·발전시키고 후대에 계승하는 데 유·무형의 기여를 했으니, 사회로부터 최소한의 혜택을 누릴 ‘지분’, 즉 일종의 시민권을 인정한다는 게 그 뼈대다. 출생에 때맞춰 일정 액수의 돈을 받건, 성인이 됐을 때 목돈으로 받건, 아니면 매달 일정액의 기본소득을 받건 간에, 결국 중요한 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빠짐없이 사회적 지분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보수 성향의 부시 정권이 들고 나온 핵심 슬로건인 ‘소유권 사회’의 얼굴 격이라 할 주주자본주의 체제가 주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인정할 수 없다는 철칙에 근거하고 있는 것과 견줘보라.
물론 여러 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제도를 앞다퉈 채택한 데는 현실적 이유도 한몫했다. 비용이 많이 들고 효율성이 떨어지던 기존의 복지제도를 수술하는 기회도 됐고, 기금으로 모인 돈을 금융시장에 투자해 국내 증시를 안정시키는 지렛대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시민권의 지평을 더욱 넓히려는 이런 제도들의 진정한 의미는 다른 데 있다. 자본주의의 생명이라 할 기회의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해법을 찾고자 사회가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느 나라에서건 이미 계층별로 엄청나게 벌어진 자산격차는 출발선에서부터 기회의 불평등을 낳는 주범이다. 교육, 주거, 의료 등 기회의 불평등이라는 장애물에 가로막힌 사례는 수두룩하다. 특히 요즘 세상에선 일자리마저 일종의 ‘고용자산’(Job Asset)으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세대간 갈등의 골은 고용시장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파이고 있다. 앞서 언급한 제도들은 출발선상의 불평등이야말로 자산격차를 더욱 벌리고, 마침내 경제의 활력 자체를 떨어뜨린다는 뒤늦은 깨달음의 산물에 가깝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모든 건 ‘분배의 재구성’이라는 좀더 큰 흐름으로 모아질 게다. 흔히 성장이냐 분배냐의 논쟁은 구닥다리 레퍼토리인 양 비치지만, 21세기 세상에서 그 중요성은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지독한 성장중독증 환자였던 이명박 정부마저 최근엔 성장이 반드시 고용을 낳는 게 아니라며 고용친화적 성장을 추구하겠다고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성장을 해도 자동적으로 일자리가 늘지 않는 현실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분배야말로 이제 별개의 해법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소수에 의한 자본, 자산의 독점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소리없이 갉아먹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문제는 분배다.”
최우성 금융팀장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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