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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2.09 21:15 수정 : 2010.02.09 21:15

이본영 법조팀장

10여년 전 판사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때 심정이 어떻더냐고 묻고 다녔다. 실없는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라 ‘미결 사형수’ 출신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하고 사형제의 명이 다해 가는 분위기여서 취재에 나섰다. 누구는 선고 전날 잠을 못 이뤘다고 했고, 누구는 다리가 후들거려 혼났다고 했다. 악독한 피고인이 선고법정에서는 어찌나 나약해 보이는지 모르겠다며 씁쓰레한 표정을 지은 사람도 있다. 법의 명령으로 ‘기계적’ 판결을 하는데도 그들은 편치 않았다. 국가에는 살인자를 처단할 “하나님의 칼”이 주어졌으니 주저하지 말라는 마르틴 루터의 입장도 위안이 되지 못한 듯하다.

이후로도 사형제는 있으나 없고 없으나 있는 상태로 살아남았다. 국가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으면서도 사형제를 사형에 처할 용기를 내지도 못했다. 사형제를 어찌할지는 국회, 정부, 헌법재판소에게 고양이 목에 방울 걸기가 돼버렸다. 교착상태는 ‘사실상 사형폐지국’(국제앰네스티) 지위를 한국에 부여했다.

사형제에 대한 두번째 본격 심리를 벌인 헌재가 조만간 선고를 할 것으로 보인다. 애초 지난해 12월 선고가 예상됐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졌다고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파장이 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선고 연기에 영향을 끼쳤다는 관측도 나온다. 만만찮은 여론의 지지가 사형제의 인공호흡기를 못 떼게 한 점을 고려하면, 헌재의 고민이 이해되는 면이 있다. 사실 사형은 존치-폐지론의 어느 쪽도 상대를 완벽히 제압하기 어려운 논쟁거리다. 가치관이 강하게 개입하기 때문에 논증이 전부가 아닌 주제라고 할 수도 있다. 사형의 범죄예방 효과가 별로라거나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점을 피해자 쪽에 말하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낮과 밤이 서로를 침식하긴 해도 상대를 영원히 몰아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어느 입장에 서든, 시간은 사형제의 편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러시아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11월 사형 집행 중단 조처를 무한정 연장하면서 “사형 폐지는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사형폐지국은 한국과 같은 ‘사실상 폐지국’을 포함하면 3분의 2가 넘는 139개국, 이 중 제도적 폐지국은 95개국에 이른다. 아프리카의 부룬디와 토고가 지난해 공식적 사형폐지국 대열에 합류했다. 적어도 사형제가 온존하는 국가는 형사사법과 인권의 후진국이라는 평가를 모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애초 사형제는 민주국가가 걸치기에는 낡고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18세기에 근대 형벌론의 주춧돌을 놓은 체사레 베카리아는 “공공의 의지의 표현인 법이 스스로 혐오하고 처벌 대상으로 삼는 살인을 저지르고, 시민에게는 살인을 금지하면서 공공연히 그것을 명하는 것은 부조리하다”고 했다. 베카리아의 조국인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공국은 그의 영향으로 사형을 폐지한 첫 근대국가가 됐다. 200여년이 흐른 20세기 후반, 베카리아의 ‘마지막 유훈’ 격인 사형 폐지가 서유럽에서부터 하나둘 실현되면서 대세는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 것이다. 존치론자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겠지만, 사형 폐지는 대개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진과 함께했다.

과장이 섞였을지 모르나, 21세기에는 사형제의 존폐에 따라 문명이냐 비문명이냐가 나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형제의 존폐는 고대에 문명사회와 야만사회를 가른 라인강이나 만리장성의 이쪽과 저쪽이 된 셈이다.

헌재가 결정할 것은 멈춰 있는 문명의 초침을 움직일지 말지이다.


이본영 법조팀장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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