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1.21 21:09
수정 : 2010.01.2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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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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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시청자들은 근래 보기 드물게 잘 버무리고 고루 양념이 배어든 ‘비빔밥 사극’을 즐기고 있다. 최근 시청률 30%를 돌파한 한국방송 수목 사극 <추노>가 그 메뉴다. 조선시대 도망 노비와 그들을 붙잡는 추노꾼들의 숨바꼭질을 그린 <추노>는 이야기의 힘과 상상력이 넘친다. 사극 <한성별곡>의 탄탄한 줄거리에, <대장금>에서 엿봤던 기기묘묘한 인물 캐릭터, 중국 무협물과 <매트릭스>를 연상시키는 날품 액션과 첨단 입체 촬영까지 어우러졌다. 추노와 도망 노비의 쫓고 쫓기는 기본 구도에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비극적 죽음에 얽힌 정치적 미스터리를 끌어들여, 픽션의 잠재적 보고는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해졌다. 억지춘향식의 여자 신윤복에만 골몰했던 2008년 사극 트렌드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역사적 사실과 야담, 블록버스터 연출의 환상적인 조합, 사극의 양질 전화다.
<한성별곡>을 만들었던 곽정환 피디와 영화 <7급 공무원>의 대본을 썼던 천성일 작가는 이 작품에서 영화풍의 압축적 감각을 바탕으로 과거 민중사를 현실의 의미 속에 한껏 교직시키는 곡예를 즐기는 것 같다. <추노>의 강력한 흥행력은 역대 어느 사극보다도 이야기 자체의 역사적 사회적 함의가 풍부하고 지금 현실을 여러모로 비춰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나온다. 대길을 중심으로 한 추노꾼 3인방이 노비를 잡기 위해 벌이는 패악질은 어딘지 모르게 이 땅의 불편한 현실과 어금지금 맞닿아 있다. 대길의 나이를 가리지 않는 욕설과 반말, 잔혹한 린치는 철거민 등치는 재개발 용역이나, 돈 빌린 서민 족치는 청부 폭력배 그대로다. 대길은 기실 <똥파리>에서 양익준이 열연했던 아비도 모르고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는 손톱만치도 없는 청부 양아치와 통하는 캐릭터다. 그런 캐릭터는 다른 추노패 천지호 일당이 산중에서 정을 통한 양반집 규수와 같이 달아나던 종복을 붙잡아 미친 듯 패는 장면에서도 새삼 확인된다. 궁지에 몰린 노비들이 당을 결성해 “밤마다 양반 대갈통에 바람구멍 하나 뚫을 거야”라며 양반 사냥을 발의하는 모습이나, 국경을 넘으려는 노비에게 돈을 뜯으려는 사기꾼의 작태는 계층 갈등이나 탈북자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추노>의 여러 설정들은 신분·계층에 대한 격렬한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는 시대 상황에 대한 비유로도 비친다.
고려 말부터 조선 후기까지 지속된 추노는 노비 추쇄 사업이라고 하여 갈수록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졌다. 특히 임진왜란 직후 국민 절반 이상이 노비였던 상황에서 경제력을 얻고 신분 해방의 욕구가 커진 노비들의 도망을 엄금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드라마 배경은 인조 때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18세기 숙종, 영정조 때 추노에 가담한 양반들의 극심한 행패와 이에 대항한 노비들의 양반 살해 등으로 사회적 논란이 커졌으며 결국 순조 때인 1801년 공노비문서를 불살라 사실상의 추노를 단념하게 된다.
제작진은 공개된 <추노>의 시놉시스 구상에서 ‘다른 시대를 다룬 픽션은 필연적으로 지금 이 시대 그 자체를 바라보게 만든다’고 썼다. 드라마 판을 깔아준 한국방송의 심중이 마냥 편치는 않을 성싶다. ‘강부자’ 정권의 대통령을 위해 선거 때 그의 귀와 손 구실을 했던 언론참모가 현재 사장이며, 그의 눈치를 보는 경영진들이 포진해 있다. 인터넷의 감상평 가운데는 ‘<한성별곡> 때의 케이비에스가 아닌지라 끝까지 각본대로 갈 수 있을까’ ‘중간에 드라마 구도가 크게 바뀔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해주는 글들도 드문드문 떠 있다. 그런 우려(혹은 기대)를 염두에 두고, 앞으로 펼쳐질 <추노> 밖의 추노를 지켜보자.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한겨레 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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