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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2.31 18:33 수정 : 2009.12.31 18:33

정세라 경제부문 기자

‘미실 세주’ 고현정씨가 연말에 <문화방송> 연기대상을 탔다. 아마도 이번 수상에 토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선덕여왕’은 빼어난 정치드라마였고, 미실은 현실 정치의 속성을 가감없이 보여주었다.

미실, 그가 연기대상을 타던 날에 국회에 들렀다. 세밑 국회는 번잡스러웠다. 온갖 법안들의 찬반 표결이 이어졌고, 제복 입은 국회 경위들은 바쁘게 회의장 주변을 오갔다.

사실 드라마가 현실 정치를 패러디한 것이겠지만, 세밑 국회는 오히려 드라마를 베낀 것처럼 보였다. 미실의 사람들이 화백회의 개최를 기습통보하고 덕만공주 직무정지를 ‘날치기’ 의결했던 것처럼, 국회도 비슷한 장면을 거듭 연출하고 있었다. 국회 경위를 동원해 야당 의원들을 막아섰고, 예산안도 노동관계법도 여당 단독 처리를 강행했다.

날치기 소동에 눈길이 쏠린 가운데 숱한 민생법안들은 2~3분 간격으로 본회의 표결에 올랐다. 찬반 불빛이 점멸하는 전광판은 사회갈등을 폭발시킬 뇌관을 품은 법안들조차 그저 심드렁하게 가결시켰다.

물론 드물게 부결된 법안이 하나 있긴 하다. 노영민 민주당 의원 등이 발의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다.

개정안 내용은 간단하다.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중소상인과 갈등을 빚을 때 유통 대기업에 영업시설 축소, 취급 품목 제한, 영업일자·시간제한 등을 권고할 수 있도록 명확한 조항을 추가한 것이다. 하지만 상임위를 통과한 개정안은 법사위를 거치면서 핵심 내용이 모조리 삭제됐다. 노 의원 등이 원안을 재수정안으로 본회의에 직상정했지만, 결과는 부결이었다. 결국 법사위 삭제안이 가결됐다.

법사위 주광덕 한나라당 의원은 “국익 차원에서” 삭제안 가결을 촉구했다. 국익 논리는 쉽게 말하면 이러하다. “중소상인 너희들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도 알아, 우리도 가슴이 아파. 근데 우리는 통상으로 먹고살잖니. 너희를 보호해주고 싶어. 근데, 세계무역기구(WTO)가 제소하면 어쩔 거야?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협정(FTA) 안 해주면 어쩔 거야? 그러니까 너희가 좀 참아. 기다려봐, 챙겨줄게. 그냥 한번 믿어봐, 응?”

하지만 참고 기다리면 ‘너희’도 ‘우리’의 대열에 들어설 날이 과연 오기는 하는 걸까? 수출이 늘어도, 수출 대기업이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해도, 너희를 위한 일자리는 좀처럼 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잘나가는 동안 너희는 구조조정 당하고, 구멍가게를 차리고, 가게를 뺏기고, 파산하고, 거리로 나앉았다.


헌법에 명시된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나 ‘중소기업 보호 육성’은 늘 뒷전이다. 1년 전 용산참사가 일어난 것도 땅주인인 재개발조합과 건설사는 부자가 되었는데 세입자인 중소상인들은 권리금과 투자비를 날리고 철거민으로 내몰렸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하루하루가 고단하고 힘들게 살고 있다. 하지만 백성은 천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천년 후에도 그럴 것이다. 백성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귀를 기울이면 모두 요구뿐이다. 이것도 해달라, 저것도 해달라. 다 들어주면 요구가 그칠 것 같으냐? 한도 끝도 없다.” 미실의 말은 철저하게 지배자의 언어였다. 그러나 이후로 천년의 시간이 흘렀고, 사람들은 지배자의 논리를 딛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었다. 그런데 어찌할까. 상생법 원안, 반대 93표, 찬성 64표, 기권 23표. 드라마에서 덕만은 승리했지만, 천년 전 미실의 목소리는 오늘도 국회에 쟁쟁하다.

정세라 경제부문 기자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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