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2.29 22:33
수정 : 2009.12.29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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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금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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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세상은 ‘섞는’ 게 대세다. 따지고 보면 사회란 것도 결국엔 시장(민간)과 국가(정부)를 한데 섞어놓은 것이다. 시장과 국가라는 두 재료가 만나 적절하게 녹아들면 응당 맛깔난 사회라는 그럴듯한 제품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시장과 국가를 어떤 ‘비율’로 섞을지는 나라에 따라, 시대 배경에 따라 서로 다른 해법을 찾을 터이다. 우리가 그동안 경험한 자본주의 역사란 것도 결국엔 커다란 위기를 겪거나 변곡점을 돌아설 때마다 시장과 국가의 ‘혼합비율’을 재조정하며 새로운 제품으로 탈바꿈해가는 과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맛깔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시장과 국가 사이의 ‘황금비율’을 찾는 일에 앞서 잊지 말아야 할 게 따로 있다. 바로 시장과 국가 자체가 우선 제구실을 빈틈없이 충실하게 맡아줘야 한다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사실이다. 한마디로, 재료의 품질과 신선도를 지키는 일이 먼저라는 얘기다.
요즘 금융권을 강타하고 있는 대표적 이슈로는 단연 케이비(KB)금융그룹의 최고경영진 구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드라마를 꼽을 수 있다. 케이비금융은 지난 9월말 기준으로 자산규모가 330조원을 웃도는 국내 최대 금융그룹이자 ‘시장’의 대표주자다. 금융감독 당국과 케이비금융 사이에 벌어지는 ‘밀고 당기기’ 싸움을 두고, 새로운 관치금융의 부활이냐 정당한 감독기능의 행사냐라는 틀을 넘어, 시장과 국가 사이의 적절한 자리매김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가늠해보는 기회로 삼아볼만한 충분한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논란의 발단은 케이비금융을 쥐락펴락하는 사외이사의 ‘전횡’에 대해 당국이 본격적으로 손보기에 나선 데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사외이사의 비리가 드러나기도 했다. 당국은 이 기회에 금융권 전반을 ‘개혁’하겠다며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를 태세다.
하지만 그간의 경과를 되짚어 보노라면, 케이비금융이나 당국이나 모두 시장과 국가라는 이름값에 걸맞은 행동을 보였는지 의문이다. 국내 금융권 대표주자로 등장한 케이비금융은 누가 뭐래도 냉혹한 시장에서 자신을 혹독하게 단련해 경쟁력을 키우는 데 소홀했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문제가 불거질 때면, 곪은 상처를 도려내기보다는 으레 핵심 자리 몇 곳을 당국에 양보(!)하는 따위의 처신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곤 했다. ‘시장’의 대표주자라는 명예치고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당국의 처지는 더 옹색한 편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금융환경에서 당국이 감독기능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얼마만큼의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해 선뜻 자신있는 답변을 내놓기 어려워 보인다. 최근의 행보를 두고 뒷북치기라는 시장의 비아냥이 나도는 이유다. 감독기능이라는 칼자루를 무기로 실상은 시장의 노른자위 ‘자리 찾기’에만 골몰하는 일부 관료들의 행태는 더욱 심각한 병폐다.
부당한 외압이라면 타협을 택하느니 끝까지 저항한 뒤 참가자들의 심판에 내맡기는 게 시장의 논리이자 특권이다. 시장이 냉혹한 건 모든 것을 내건 채 그만큼의 책임있는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역할과 자부심은 탐욕과 이기심을 앞세우기 마련인 시장의 한계를 명확히 일깨워주고, 그 부작용을 예방하거나 상처를 꿰매주는 데 있을 뿐이다.
무릇 제 색깔을 강하게 지닌 재료들이 섞여야 그 제품 역시 맛을 내는 법이다. 김이 빠졌거나 제 맛을 잃은 재료로는 아무리 애쓴들 맛깔난 제품을 선보일 수 없다. 제 스스로 냉혹함을 벗어던진 길들여진 시장, 감독의 얼굴을 한 채 시장을 기웃거릴 뿐인 치졸한 국가가 한데 섞였을 때, 그 사회는 맛깔은 제쳐두고라도 그저 ‘불량품’일 뿐이다.
최우성 금융팀장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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