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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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기원전 486~465)는 ‘파라오 콤플렉스’를 앓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거대한 것에 집착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이 젊은 대왕이 그리스 본토를 칠 때 231만의 군사를 포함해 모두 528만명을 동원했다고 헤로도토스는 전한다. 크세르크세스는 대군을 이끄는 도중에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역사를 함께 벌였다. 그리스 북부 아토스반도를 절단하는 운하를 판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이 전례없는 토목사업을 두고 “짐작건대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후세에 기념비로 남기고 싶어 순전히 과시욕에서 운하를 파도록 명령한 것 같다”고 기록한다. 크세르크세스의 오만은 한없이 부풀어올라 자연현상을 심문하고 처벌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대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해협 앞에 이르자 그는 800척의 배를 나란히 엮어 대륙을 횡단하는 부교를 세웠다. 이때 큰 풍랑이 일어 다리를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진노한 대왕은 해협에 죄를 물어 채찍 300대를 치고, 바다의 신을 결박한다는 뜻으로 족쇄를 던졌다. 그의 명령을 받은 수하가 해협을 향해 소리쳤다. “네가 해코지를 한 죄로 우리 주인께서 네게 이런 벌을 내리시는 것이다. 대왕께서는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너를 건너가실 것이다.” 그의 뜻대로 그는 바다를 건넜다. 크세르크세스가 보여준 방자한 오만을 그리스인들은 ‘히브리스’(hybris)라고 불렀다. 그리스 신화와 비극은 이 히브리스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로 넘친다. 히브리스의 작용은 일상의 작은 일에서부터 공동체의 큰 일에까지 두루 미쳤다. 음식을 탐해 터무니없이 먹어대는 것, 과음·폭음으로 인사불성이 되는 것, 요컨대 쾌락에 빠져 욕망의 종 노릇을 하는 것, 이 과도함이 히브리스다. 히브리스는 다른 사람을 향해 나타나기도 한다. 타인의 인격과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수치심과 모욕감을 주는 것, 그리하여 자신을 과시하고 쾌감을 얻는 것, 이것이 인간관계에서 발동하는 히브리스다. 히브리스는 시민사회 차원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솔론의 입법 이래 아테네는 시민 기본권 유린 행위를 재판에 부칠 수 있는 ‘히브리스 사건의 기소권’을 시민에게 주었다. 힘 있는 자의 오만이 시민의 권리를 침해할 때 히브리스 단죄법이 작동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금언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쓰여 있었는데, 이 말은 우선 “너 자신의 한계를 알라”는 뜻이었다. 자기 한계를 잊어버리고 히브리스에 휘둘리면 그때 닥쳐오는 것이 네메시스(nemesis), 곧 응징과 복수였다. 사람들은 네메시스를 신으로 섬겨 경계했다. 크세르크세스의 히브리스는 네메시스조차 제압한 듯 위세당당했다. 발칸반도를 파죽지세로 남하한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 바다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맞붙었다. 그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옥좌를 마련하고 앉아 마치 영화를 보듯 전투를 감상했다. 그러나 한나절 만에 페르시아 해군은 그리스 삼단노선의 공격에 궤멸적 타격을 입고 태반이 수장당했다. 장군들과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크세르크세스는 제 옷을 갈기갈기 찢으며 “오토토토토이!”(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하고 울부짖었다. 네메시스는 이렇게 돌아와 히브리스의 값을 받아냈다. 권력이 지혜와 절제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히브리스는 튀어나온다. 지금 이 나라가 그런 모습이다. 권력의 오만은 전직 대통령의 죽음도, 시민의 경고도, 야당의 항의도 깔아뭉개고 진군한다. 히브리스는 네메시스를 부른다. 네메시스를 요즘말로 하면 뭐가 될까. ‘일패도지’다.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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