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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1.10 20:06 수정 : 2009.11.10 20:06

김회승 산업팀 기자

얼마 전 취재차 베이징을 찾았다. 정확히 5년 만이다. 달라진 게 없는 듯하면서도 많이 달라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새 공항 청사는 웅장함을 넘어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누워 있는 용을 형상화했다는데, 겉모습은 우리 영종도 공항을 빼닮았다. 물론 규모는 서너배쯤 컸다. 계류장에서 승객을 나르던 낡은 버스는 사라지고, 대신에 첨단 모노레일이 입국장까지 죽 깔렸다.

호텔로 가는 길에 첫 방문 때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당시 베이징 도심에선 차로 양쪽에 짝을 맞춰 서 있는 공사판 인부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도로 바닥의 공사용 전깃줄을 들었다 내려놓는 게 이들이 하는 일이다. 일당은 10위안, 당시 우리 돈으로 1400원. 플라스틱 보호턱을 설치하는 것보다 사람을 쓰는 게 싸게 먹히던 때의 풍경이었다. 이번에도 시내로 가는 길은 여전히 곳곳이 공사중이었지만, 보호턱을 대용하는 잡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장 큰 차이는 달러에 대한 대접이었다. 동네 슈퍼마켓에서도 통했던 기억에 달러만 환전해 갔다가 여러 번 낭패를 봤다. 호텔 커피숍에서 심지어 시내 백화점에서도 달러는 기피 대상 1호였다. 달러를 내밀면 “그러면 차라리 신용카드는 없느냐”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원화도 똥값이긴 마찬가지다. 원화 대비 위안화 가치는 5년 새 20% 정도 올랐지만, 장바구니 환율로 보면 50%는 거뜬히 치솟은 느낌이다.

중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갑과 을이 바뀐 지 오래”라며 침을 튀겼다. 베이징 순환도로 인근 공장 터는 땅값이 몇년 새 20배가량 뛰었고, 그나마 진출·입이 쉬운 알짜 터는 아무리 값을 쳐줘도 구하기 어렵다고 했다. 지방정부와 현지 업체에 상당한 지분과 기술을 내주지 않고는 공장을 더 지을 수도, 늘릴 수도 없다고 토로했다. 본사 임원만 와도 당 관료들이 만찬을 열어 밤새 ‘간베이’(건배)를 외치던 기억이 이젠 가물가물하단다. “일본은 자기들하고 차원이 다른 선진국 대우를 합니다. 패전 경험 때문에 일종의 두려움도 갖고 있지요. 하지만 한국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아류’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경제적으로도 더는 경쟁 상대로 보지 않아요. 중국인들 ‘혐한’과 ‘반일’ 감정은 그 뿌리가 전혀 다른 셈이죠.” 중국법인을 총괄하는 한 대기업 임원은 한국 기업의 처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얼마 전 중국 쑤저우 성장이 방한하자 대표이사 두 명이 하루 종일 그를 영접했고, 엘지그룹은 광저우 정부의 갑작스런 요청 탓에 총수의 현지 방문 사실을 쉬쉬해야 했다. 두 기업이 수조원대 투자를 한 곳들이다. 갈수록 커지는 최대 시장의 위력 앞에, 굴지의 한국 기업들조차 ‘일개’ 지방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도도한 변화는 ‘중화주의’ 흐름이다. 중국은 2000년대 이후 대대적인 ‘중국판 역사 바로잡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한족 중심의 기존 역사관을 대신해, 전세계 화교와 소수민족, 홍콩과 대만을 아우르는 ‘범중국’으로 판을 넓힌 것이다. “수십개 소수민족이 있다고 하지만 전체 인구의 95%가 한족입니다. 서양에서 종종 거론하지만 사실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소수민족들도 머잖아 오성기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될 겁니다.” 저녁 자리에서 만난 중국 관료의 자신감은 의미심장하고 섬뜩했다. 한국이 지난 30년, 대략 한 세대 동안 중국한테 비교우위를 누리던 때는 지났다는 얘기는 더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5년 뒤 다시 찾을 베이징의 모습이 왠지 무섭고 두렵다.

김회승 산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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