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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0.29 22:14 수정 : 2009.10.29 22:14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1874~1926, 재위 1907~1910)은 투명인간에 가까웠던 군주였다. 생전 행적이 포폄의 대상이 됐던 다른 임금들과 달리 존재감이 없었다. 큰 심신장애가 있었고, 등극 3년 만에 나라가 망한 탓도 있을 터다. 한국인들은 순종이 이 땅 최후의 왕이며 장례식날 만세운동이 일어난 정도 외에는 그의 처절한 인생을 거의 알지 못한다.

순종은 친모 명성황후를 난도질하고 주검을 불태운 일제에 떠밀려 즉위했다. 후견인을 자처한 통감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떨면서 ‘국정 지도’를 받았고, 1910년 친일파 대신들이 멋대로 도장을 찍은 병합조약에 나라가 결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뒤 창덕궁에서 감시 속에 살다 16년 뒤 생을 마쳤다. 1926년 4월25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숨질 당시 측근에 구술한 유언은 참담한 회한으로 얼룩졌다. “병합조약 인준 당시 강린(일제)이 나를 유폐하고 협제(협박)해 명백히 말할 수 없게 한 것이므로 …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 … 말할 자유가 없어 지금까지 이르렀다 ….”

순종 서거 83주기인 올해 뜻밖에도 그를 기리는 국가적 캠페인이 한창이다. 순종을 근대박물관 선각자로 추앙하자는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사업’. 1909년 11월1일 순종이 창경궁 전각들 안에 제실박물관을 동물원, 식물원과 같이 세워 일반 공개한 것을 한국 박물관 역사의 시발로 삼겠다는 것이다. 사업 주체인 국립중앙박물관(이하 중박)은 최근 국내외 명품들을 집대성한 100주년 특별전, 박물관 대축전, 국제학술대회 등을 잇달아 벌이며 분위기를 지폈다. 11월1일 기념 상징물 제막식, 11월2일엔 정부 요인이 참여한 100주년 기념식을 연다. 중박 앞은 지난달부터 기념 공연과 패션쇼 등의 이벤트로 흥청거린다. 본관 앞 거울못엔 울긋불긋한 전통 동물상들이 가득 떠다니고 있었다.

최광식 관장은 제실박물관 개관 때 순종이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으로 말했다는 ‘여민해락’(與民偕樂:100주년 특별전 제목이기도 하다)의 정신이 근대박물관 역사를 열었다고 주장한다. 국가 정통성의 상징을 수집, 보존하는 박물관에서 순종의 애민 정신이 국내 박물관의 정통성으로 이어져 왔음을 내비친 것이다.

‘여민해락’은 병합 뒤 창덕궁을 좌지우지했던 일본인 사무관 곤도 시로스케가 1926년 지은 <이왕가 비사>에 나오는 말이다. 이 기고만장한 회고담에서 곤도는 1907년 통감 이토가 궁정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 신설을 진언해 허락을 받았고, 설립을 궁 안에서 만류하자 명군은 백성과 해락했다며 순종이 설득해 예정대로 됐다고 밝혀 놓았다. 되레 일본인들의 권유(강권)가 박물관 설립으로 이어졌다는 근거가 아닌가. 게다가 제실박물관은 창경궁의 권위 부수기에 충실했다. 전각의 어좌 바로 옆에 진열장을 들여놓고 흙 묻은 신발로 관객들이 드나들게 했다. 1980년대 창경궁의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제실박물관 후신인 옛 이왕가 박물관(훗날 장서각)도 같이 헐린 사실은 또 무엇을 뜻하는가.

100주년 잔치는 최근 거듭 씁쓸한 오점을 찍었다. 중박 쪽이 창경궁 전각들 앞에 제실박물관 터 기념 표석을 세우려다 문화재청의 거부로 무산되자 11월1일 창경궁에서 치르려던 100주년 고유제와 표지석 설치 행사 등을 황급히 취소하고 답사만 하겠다고 정정하는 촌극을 벌인 것이다. 한 중견 역사학자는 “궁궐 파괴의 자취로 경계해야 할 유적에 이를 기리는 표석을 세우는 건 역사적 무지의 극치”라고 혀를 찼다. 성찰 대신 경축 일색인 박물관 100주년 사업이 후대의 조롱거리로 남지 않을까 두렵다.

노형석 대중문화팀장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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