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0.13 18:23
수정 : 2009.10.13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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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본영 법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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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의 근본 정신은 복수다. 근대 이후 형벌은 교화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찾아냈지만, 인류가 고상한 척해도 하는 수 없이 밥 먹고 배설하는 포유류 종인 것처럼 형벌의 본질도 어디 가지 않는다. 3800여년 전 바빌로니아 왕 함무라비의 공식은 간명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의는 신성하기보다는 싱겁다. 장구한 시간이 지나 이를 문자 그대로 실천한 김승연 회장 같은 사람이 있을 정도로, 함무라비의 법정신은 원초적 본능과 닿아 있다.
함무라비식 표현은 무지막지한 엄벌주의로 받아들여지는 수가 많지만 합리적인 구석도 있다. 내 이빨 부러뜨린 상대방의 이빨을 뽑을지언정 갈비뼈는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다.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하지만, 피해자 처지에서는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다. 각지의 문명은 이후로도 범죄와의 등가성을 심각하게 부정하는 형벌 관행을 보였다. 절도, 간통, 동성애, 유일신에 대한 불경 같은 것들도 사람 목숨을 빼앗을 이유로 충분했다. 인류의 진보는 범죄와 처벌 사이의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영이 사건’은 이 흐름과 다른 측면에서 고민을 안겨준다. 죗값이 적다고 아우성들이다. 화학적 거세 주장도 나온다. 그 몹쓸 짓의 대가로 ‘거세’는 직접적 등가성이 있는 것도 같다. 이 사건에서는 법정 최저 형량의 두 배가 넘는 징역 12년형이 선고됐지만, 법정 최저 형량을 밑도는 형량이 선고되는 사건도 부지기수다. 5살 아이를 굶기다가 야구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한 계모에게 1심이 선고한 형량을 절반인 1년6월로 깎은 항소심 재판부도 있다. 개, 돼지를 이렇게 다뤄도 동물보호법 위반죄를 묻는 세상이다.
시간이 들끓는 여론을 식히겠지만, 일반 법감정과 판사들의 양형감각 사이의 충돌은 계속될 것이다. 통계 추이와 사회 변화의 흐름을 보면 인간성에 회의를 품게 할 사건들이 줄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 부장판사는 “패러다임 변화를 느낀다”고 했다. 국가보안법 같은 ‘국가적 법익’을 내건 법의 남용과 수사·재판 기관들의 적폐에 넌더리가 나 사법제도를 불신하던 시민들이 생명과 존엄이라는 ‘개인적 법익’에 관해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어차피 ‘눈에는 눈’이라는 형벌의 응보적 성격을 외면하기 어렵다. 진화생물학자 존 메이너드 스미스의 매파-비둘기파 게임모델에서 진화론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것은 항상적 매파나 비둘기파가 아니라 보복파다. 보복파는 공격당하지 않으면 비둘기파와 다름없지만 공격받으면 매파로 변한다. 형벌제도가 맡은 게 보복파 역할일 것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엄벌주의의 길로 접어들기에는 그 밑에 깔린 지뢰가 겁나는 것도 사실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나영이 사건’의 확정된 재판 결과를 놓고 “평생 그런 사람은 격리시켜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타박했다. 삼권분립 원칙에 충실하지 않은 말이다. 이귀남 법무부 장관은 가석방심사위원회가 수형 태도 등을 종합해 결정할 일인 줄 알면서도 가해자 조두순씨의 가석방은 없다고 미리 못박았다. 부박한 법치주의의 한계다. 이런 정권이 주도하는 법치주의, 엄벌주의 바람은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칼에는 눈이 없다.
함무라비의 법정신만큼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도둑질을 들키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주게 되리라”고 하다,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갚겠다고 말하지 말라”는 솔로몬의 가르침 중 어느 것이 더 지혜롭다는 말인가? 지혜와 단순함이 친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본영 법조팀장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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