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9.22 21:39
수정 : 2009.09.2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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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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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각사의 대표작,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은 침묵의 공간에서 한없이 우리를 사유하게 만든다. 고졸한 미소를 띤 83호 반가사유상의 명성에 다소 가려져 있지만, 이 반가상은 여성적인 얼굴과 가냘픈 몸매가 뿜어내는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오똑한 코와 가뿐하게 새긴 눈과 입, 토실하게 빚어낸 뺨, 광대뼈의 은근한 볼륨감이 도드라지는 얼굴의 미소는 단연코 우뚝하다.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 반가상의 미덕을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뼈저린 거룩함”이라고 짚은 바 있다. 제작지가 고대 삼국 중 어디인지를 둘러싸고 여전히 논쟁이 분분하며, 제작 경위와 발견 장소도 안개에 싸여 있어 이 불상의 신비감은 더욱 각별하다. 2004년 국립고궁박물관이 된 옛 국립중앙박물관의 지하 전시실에서 83호와 나란히 놓여 정밀의 미소를 내뿜던 78호 반가상의 자태를 잊을 수 없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하 중박)의 단독 진열장에서 사유 공간을 빚어냈던 78호 반가상은 지금 미국 엘에이(LA)에 있다. 엘에이 카운티 박물관(라크마·LACMA)이 이달부터 175평에 달하는 새 한국실을 열면서 재개관 특별전 작품으로 12월까지 대여 전시중이기 때문이다. ‘아기부처’로 유명한 경주 삼화령 미륵불 등도 함께 출장을 갔다. 올해 초 라크마 쪽으로부터 한국실을 채울 대표 명품을 대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중박이 한꺼번에 내어준 것이다.
박물관 쪽과 언론은 우리 문화 알리기의 모범 사례로 전시에 호평을 쏟아냈다. 그러나 실제 반가상의 대여 허용 여부를 놓고 박물관과 문화재 전문가들 사이엔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다. 유물 안전과는 별개로 나라의 얼굴인 대표 문화재를 너무 쉽사리 반출하려 한다는 ‘격’의 문제가 쟁점화한 것이다. 지난 6월 78호 유물 대여를 최종 결정하는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위원들끼리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한국도 국력이 커진 만큼 핵심 문화재의 경우 더는 내보내지 말고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국외 홍보 활용론과 팽팽히 맞섰다. 대대적인 한국 문화재 기획전이 아닌 지역 미술관의 한국관 개관에 명품을 데꺽 내주는 게 사리에 맞느냐는 지적도 나왔다고 한다. 격론 끝에 6 대 5의 표차로 반출안은 통과됐지만, 상당수 관계자들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인식이 미진한 전통문화를 외국인들에게 알린다는 의미를 무시할 수 없지만, 명품 문화재들의 잦은 국외 출장이 문화 홍보의 적절한 대안인지는 재고할 여지가 있다. 1957년 미국에서 ‘한국미술 5천년’ 전이 시작된 이래 반가사유상과 신라 금관, 고려청자 등은 40년 넘도록 단골 전시품으로 비행기를 타곤 했다. 78호와 쌍벽인 83호 반가사유상도 지난해 한국 문화예술을 유럽에 소개하기 위한 벨기에 한국 페스티벌에 서너 달간 다녀왔다. 당시 83호를 포함한 국보 출품작의 보험 가액만 900억원에 육박했다. 중박의 경우 내년에는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한국 유물 특별전 전시가 예정돼 또다른 국보급 명품을 내보내야 할 판이다. “인상적인 대형 유물이 빈약한 탓에 외국 미술관들은 한국 문화재 전시를 할 때마다 금관, 반가상 등의 최고 명품들을 빌려 달라는 요구가 관행화되어 있다”는 게 중박 한 간부의 말이었다. 사실 명품 내주기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새 주제의 스토리텔링 개발, 묻힌 유물들에 대한 재조명 등으로 참신한 전시 콘텐츠를 만들어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세계 곳곳의 박물관에 50여곳 넘는 한국관이 개설됐지만, 한국이 여전히 문화적 약소국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엘에이의 반가상 대여 전시는 드러내고 있다. 반가상의 걸출한 품격에 걸맞은 국격(國格)을 언제쯤 갖출 수 있을 것인가.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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