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9.17 21:09
수정 : 2009.09.17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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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애 사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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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자락에서 늦은 휴가의 며칠을 그 유명한 ‘대치동 학원가’에서 지낼 일이 있었다. 삼십년 가까운 서울살이의 대부분을 마포 주변에서 보낸 ‘강북파’였던 까닭에, 서울특별시에서도 ‘강남특구’의 한복판에서의 생활은, 먼 여행이라도 온 듯 낯설면서도 설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특히 학원들이 밀집한 롯데백화점 주변 대치4동의 낮은 의외로 조용하고 한산했다. 바로 한 블록 옆 테헤란로의 번잡함이나 역삼동 일대 고층아파트촌의 답답함과 대조적으로 키 낮은 빌딩과 다세대주택들이 옹기종기 자리를 잡아 서민적인 풍광마저 연출했다.
그런데 학교가 끝나고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오후 6시 무렵부터 거리에는 아연 생기가 돌았다. 학원들은 물론 일제히 불을 밝히고 골목골목 식당들 앞에는 허기에 찬 학생들이 줄을 섰다. 즉석 간식을 팔거나 샌드위치나 피자처럼 포장해 갈 수 있는 테이크아웃점일수록 줄이 긴 것도 이채로웠다. 과목마다 시간마다 전문학원을 순례해야 하는 학생들이 차분히 앉아 밥을 먹을 여유가 없는 까닭이었다. 낮엔 아이들에게 떡볶이를, 심야엔 강사들에게 맥주를 파는 ‘복합음식점’이 가장 잘되는 업종이란다. 인기 강사의 학원이 들어 있는 건물일수록 점포 자릿세가 비싼 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학원가가 온종일 붐비는 주말이면 식당 줄은 자녀를 대신해 간식을 챙기는 ‘열성맘’들이 가세해 더 길어지곤 했다.
대치동의 화려한 진면목은 밤 10시 이후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난 7월7일부터 학원 불법교습 신고포상금제가 시행되면서 ‘학파라치’의 눈을 피해 학원들이 일제히 문을 닫는 까닭에 학생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대치사거리 일대는 자녀를 태우러 나온 부모들의 승용차가 왕복 8차로 가운데 6차로를 차지할 정도여서 교통경찰들은 심야 특근을 하느라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이 차량 행렬이 곧장 집으로 가는 것도 아니라고들 했다. 어디는 암막 커튼으로 불빛을 막아 학파라치를 속이고, 누구는 끼리끼리 오피스텔이나 집을 따로 구해서…, 심야 열공을 계속한단다.
새삼 관심을 갖고 찾아보니, ‘대치동 아줌마 대열’에 합류한 동창생 두 명을 동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수도권에서 내내 살아온 한 친구는 서울의 한 특목고에 다니는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작은 전셋집을 구해 두집살이를 하고 있었다. “입학 때보다 더 치열한 내신 경쟁 탓에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을 수가 없어” 다달이 과외비만 수백만원이 들어간다고 털어놓았다.
또다른 친구는 오랫동안 학원 강사로 일하며 아들을 명문대에 입학시킨 ‘노하우’를 살려 최근에 직접 학원을 차렸다. “학원가에도 풍선효과가 있어. 사교육비 대책이니 입시제도 개선이니 나올 때마다 새로운 맞춤 과외와 학원이 끊임없이 새로 생기거든.” 그래서 임대료가 인근 서초동 쪽보다도 5배에서 10배까지 비싸단다.
금융위기 이래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경기 불황의 쓰나미도, 잇따른 두 전직 대통령의 국상도, 유명 스타들의 충격적인 자살사건이나 결혼 스캔들도, 천만 국민을 감동시키는 영화들의 유혹도, 그 어떤 세상사도 닿지 않는 진공지대. ‘대치동 과외공장’의 아이들은 그렇게 ‘밤새 작업등을 밝힌 채 미싱을 돌리듯’ 입시노동을 하고 있었다.
경제학자이자 서울대 총장 출신인 정운찬 총리 후보가 다음주 청문회를 앞두고 있다. 평소 남다른 교육개혁 소신을 밝혀온 그에게 과연 ‘미싱을 멈출 수 있는 획기적인 묘안’이 있을지 궁금하다.
김경애 사람팀장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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